불법복제, 저작권, 노동과 인권의 문제

출처: 인권오름  228호 나들터 [집단지성의 노동과 놀이], 2010년 11월 24일 (http://hr-oreum.net/article.php?id=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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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복제, 저작권, 노동과 인권의 문제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어지고 특히 청년실업이 늘어만 가는 즈음, 불법복제 때려잡는 것을 일삼아온 각종 산업협회들은 우리가 불법복제를 줄이면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주장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소프트웨어산업을 포함한 정보산업(IT)과 음악, 영화, 게임 등의 문화산업에서 불법복제가 많은데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취업하는 부문이니 청년실업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수 천에서 수 만의 일자리 창출을 턱없이 잘도 떠벌리지만, 불법복제의 피해액을 계산할 때 그 (영화 다운로드 한 사람들은 모두 극장가서 영화 볼 사람들이었다는) 전제가 잘못돼서 그 피해액도 상당히 과장된 것임을 미국의 정부기관조차 인정한만큼(“미 정부, 해적질(불법복제)에 대한 연구가 엉터리임을 인정,” 2010.4.17) 창출된다던 일자리 수 역시 상당히 과장되었을 게 뻔하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첩 잡듯이 불법복제를 잡아먹는다. 불법복제 때문에 문화산업·소프트웨어산업이 망하고, 돈 안 내고 다운받으면 제작한 사람들 다 굶어죽고, 그래서 불법복제는 이제 일자리까지 빼앗고 있단다. 그런데, 불법복제 때문에 예를 들어 영화산업은 망하고 있나?

불법복제 때문에 망한다던 영화산업의 성장

헐리우드 영화 자본을 대표하며 저작권에 목숨거는 대표 단체의 하나인 미국영화산업협회(MPAA)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의 전세계 극장 수입(입장권 판매 수익)이 2008년에 비해 9%나 상승해 미화 299억 달러의 수익을 냈다. 2005년부터 보면 30% 이상 상승했다. 그래서 2009년은 영화산업 성장율 사상 가장 성장한 두 번째 해가 되었다한다. 심지어 2008년의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휘청할 때도 영화산업은 끄떡하지 않았던 것이다(대체로 인터넷으로 파일공유할 수 있더라도 영화가 좋다면 극장가서 보기 때문이다). 국내 영화산업도 엇비슷하다. 헐리우드 영화와의 경쟁, 헐리우드식 투기나 다름없는 영화 투자 등의 다양한 요인 때문에 비록 수익은 떨어졌지만, 1996년에 2천 만 명이 안 되었던 영화 관객 수가 2009년에는 1억 5천 만 명에 이른다. ‘음반’산업은 쇠퇴하는 반면 ‘음악’산업은 더 없이 발전하고 있듯이, 부가시장(비디오나 디브이디 대여)과 같이 특정한 배급기술에 의존한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더라도 영화산업 전체는 커져왔다. 불법복제 때문이라면 함께 줄었어야 할 극장 관객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와의 전쟁’에 버금가는 ‘불법복제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인터넷 이용을 필터링(검열)하고 모니터링(사찰)하고 삼진아웃제로 인터넷 접속을 아예 차단시키려는 조치들을 정당화해왔다. 또, 이제는 제작 노동자들(스텦)까지 앞세워 불법복제를 공격하고 있다. 2009년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을 위해 만들어진 한 홍보 비디오를 보면, 영화 제작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노동과정이 힘겨워지는 것은 돈 안 내고 영화 다운받는 불법복제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제작 노동자들의 “꿈과 열정”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은 우리가 불법복제를 줄이고 “굿 다운로더”가 되는 것이란다. 그런데 불법복제 때문에 망한다던 영화산업이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입장료 수익을 꾸준히 올렸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게 번 돈으로 유명 감독이나 작가나 스타 배우라는 ‘저자’에게는 수 십 억씩 챙겨주면서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다수의 제작 노동자들에게는 도대체 왜 최저생계비조차 공정하게 지불하지 않는가? 저 홍보 비디오에는 임금 체불과 불안정 노동에 고통받으며 그 “꿈과 열정”을 잃고 자살에까지 이르는 노동자들의 체념과 분노가 몽타주되지 않을 수 없다.

… 얼마 전 오래된 영화 친구가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어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울음 섞인 그 목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어야 했던 저는 제발 친구가 죽지않고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 정도로 겁이 났었습니다. (“영화스태프, 영화판을 떠나는 이유,” 2010.3.24).

우리가 “불법 다운로더”가 아니라 “굿 다운로더”가 될 때 이런 극단적인 불안정 노동의 고통이 진짜 사라지게 된다면야 ‘베리 굿 다운로더’도 될 참이지만, 불법복제가 줄면 행여 일자리가 창출될지언정 “꿈과 열정” 대신 체념과 고통으로 견뎌야 하는 일자리일 수밖에 없다면 불법복제를 계속 더 많이 해서 차라리 그런 일자리가 아예 생기지 않게 해야 할 지경이다. 영화 제작 노동자들을 또 한 번 팔아먹는 저런 식의 악랄한 인간주의(휴머니즘) 이야기에 지금껏 우리는 얼마나 많이 넘어가 주었는가…

‘저자’의 분화, 양극화

문화산업에 고용된 제작 노동자들의 예술 창작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믿음(특히, 대중 예술가 지망생들의 강력한 믿음)과 다르게 저작권법의 철썩같은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서만이 획득된다.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이 그랬듯이. 2007년 말에 무려 3개월 동안 지속된 ‘미국작가조합’(Writer Guild of America)의 파업은 온라인상의 추가 수익을 작가들에게 보상해 달라는 핵심 요구 사항 중의 하나를 관철시키면서 끝맺었다. 지적재산의 창조자가 그 노동의 성과를 보상받는다는 것이 바로 저작권 취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러나 투쟁을 벌이고 나서야) 대중적으로 그것이 공정한 요구로 인식되고 결국 다소간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었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겠지만, 온라인 유통을 통한 저작권 수익이 자신들 임금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면서 이제 작가 노동자들까지 (인터넷의 공유문화를 싸잡은) 불법복제 때려잡는 일에 나서게 되지 않을까? 아닌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의 무대예술 및 영화 관련 기술자와 예술가를 총괄하는 ‘무대예술피고용인국제연합’(The 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trical Stage Employees)의 국제부장이 최근 불법복제 해적질이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의 일자리까지 빼앗는다고 주장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영화제작 편수가 줄고 수익이 감소하고 있다면 모를까 제작 노동자와 소비자 간의 (불필요한) 대립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 따로 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 배우들이 불법복제하지 말라고 나서는 것은 씁쓸하지만, 노조가 저러고 나서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화나는 일이다.

또한 ‘미국작가조합’의 파업 사례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노조가 파업을 통해 온라인 저작권 수입의 분배를 얻어낼 수 있었던 조건이다. 2005년부터 작가조합의 가장 우선한 사업 목표는 ‘리얼리티 티브이 쇼’의 제작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대본 없이 제작이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지적재산의 저작자가 될 수 있는)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수당없는 추가노동과 만성적인 불안정 노동을 대본 작가 임금의 절반을 받으며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조합 지도부가 이들에 대한 노조 관할권을 요구하며 파업할 때 미디어산업 자본은 온라인 저작권 수입의 일정한 분배를 약속하는 대신 리얼리티 티브이와 애니메이션 제작 부문의 관할권을 노조가 포기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작가 노동자들의 저작권 수입 분배는 미조직된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희생으로 가능했다.

저작권: 노동과(의) 연대, 그리고 인권의 문제

이렇게 이간질 놓는 것에 분열되는 우리의 문제 상황을 벗어나 뭔가 제대로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문화의 생산-소비-공유의 애초 자연스러운 순환에 걸맞는 연대와 호혜가 복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을 나누면 좋고 하는 식의 문화가 확산되면 도움이 되지만, 산업화된 문화·정보 생산 구조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구조적 수준의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자들의 ‘자발적 가난’의 주창과 같은 우스운 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배급-유통 자본이 매개하고 통제하는 문화상품을 가운데 놓고 조장된 소비-이용자와 직접 생산자 간의 적대가 아니라 적극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현행법상 “불법 다운로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즉 정당한 파일공유인데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불안과 잠재적 위협 속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 그리고 자기의 노동 처우가 개선되는데 거의 도움이 안 되는데도 저작권이 자기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믿게 되는 문화산업·정보산업의 노동자 사이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연대는 오히려 불법복제에 큰 기여를 해왔다고 철퇴를 맞고 있는 인터넷, 특히 피투피(p2p) 기술의 도움으로 이미 확산되어 왔다. 하지만 더 널리 이런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저작권(그리고 불법복제)을 노동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자본-노동이 한 몸으로 뭉뚱그려진 저작자와 소비자(나 해적 공유자)가 대립하는 구도로만 설정된 이 분할 통치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그와 같은 연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보운동, 정보인권운동은 저작권 체제를 개혁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 연대의 정치학을 아직 기획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스웨덴 해적당의 한 의원이 초청받아 왔는데, 세계 곳곳의 해적당이 “울타리 없는 바다”를 위한 과감한 정치를 펼치고 있지만 고용된 노동자들의 소외된 노동에 대해서 그리고 해적과 노동자 간의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과감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그런 연대가 없다면 정보공유운동은 저작권법 강화의 과도함 정도를 개선하거나, 혹은 노동 유연화처럼 자본도 (그 회전속도를 늦추는 병목구간을 뚫기 위해) 다소 유연화하는, 그래서 문화 생산물의 소비문화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는 정도의 정보소비자운동에 그칠 수 있다. 소비자운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정보소비자운동은 저작권법이 잘 개정돼서 공정이용을 충분히 보장받으면 끝이지만, 그 지적재산을 직접 생산하는 그러나 그 생산과정을 자율적으로 자기결정할 수 있기는커녕 전면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지적재산권체제는 이미 만들어진 지적재산의 소비(이용) 방식에 대한 줄다리기이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것이었고 그래서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정보가 사유물이 되고 지식이 재산이 되는 바로 그 지적재산의 생산과정에 구조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인권 침해의 문제이다.

그래서 불균형으로 치닫는 지적재산에 대한 법적 권리 체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정보와 지식이 산업적 형태로 생산되는 현장의 노동과정과 대중 소비과정(이용 및 생산참여)의 연관성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엮어내야 한다. 초국적 제약자본이 수많은 환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약장사를 벌일 수 있도록 하는 특허 제도를 바꿔내고 의약품 접근권을 우선하는 운동 역시 제약산업의 생산과정에 개입해 들어가는 다양한 실험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대안을 만드는 연대, 인권

여기서 저작권의 문제, 지재권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는 것, 그래서 노동과(의) 연대의 문제로 본다는 것은 산업 내 노동에 대한 착취와 인권 침해에 개입하고 연대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저작권을 노동과의 연대와 인권으로 문제설정하는 것은 현재의 지배적 생산 구조에 대한 대안, 인권과 사회정의가 기본으로 된 정보문화와 정보생산방식들을 창안하는 데까지 미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급진적인 핵심의) 실현이 국가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지 않지만, 찰떡같이 붙어있는 노동과 소득을 분리한다는 생각을 우리 맥락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다면 저작권(과 불법복제) 논란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고통과 비용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 저작 노동에 대한 보상(논리)이 저작권(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노동과 별개로 보장된 생계 보장의 경제(생태 규범)는 연중 영화 찍는 날보다 일(당)없는 날이 더 많은 제작 노동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할 뿐더러(영화산업노조는 실업부조제도를 요구하고 있다), 28시간 내리 촬영하는 식의 불안정 노동구조 자체를 벗어나 새로운 창작 방식을 다양하게 모색해볼 가능성도 열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영화산업을 승자독식의 투자-배급-상영 구조(개봉 첫 주에 흥행의 성패를 내는 관행: 수 십 억대의 대량 판촉[마케팅] 및 스타배우 영입, 대형영화의 ‘창고대방출’과 중소영화의 조기종영 및 교차상영 등)로 몰아가는 (투기)자본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여러 대안적인 문화노동운동이 전개된다면, 영화 제작 노동자들은 지금처럼 극악한 임노동 관계의 굴레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독립적이면서도 상호부조적인 생산방식에서 자율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노동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불법복제 역시 불법의 딱지를 떼고 영화 애호가(팬)들의 자발적인 입소문 판촉(마케팅) 활동으로 다시 보이게 된다.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공유문화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통제받아야 할 불법 행위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영화를 자진해서 더 널리 알리고 퍼나르고 그러면서 그 수익 창출에 기여하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호혜의 마음은 중간업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 직접 생산자들에게 직접 보상하고 후원할 수 있는 방식들을 수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분리와 평행하게 생산물(영화)의 판매와 수익를 분리시키는, 영화산업 내에서조차 다양한 실험들이 되고 있는 판에…

다시, 불법복제: 노동과(의) 연대의 문제

즉, 불법복제 역시 지금과는 다른 생산 관계, 사회적 관계 속에서라면 누군가의 노동 혹은 예술 활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참여하는 협력적 생산 활동일 수 있다. 사실, 복제는 이제 생산이다. 오늘날의 네트워크문화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불법)복제는 관심(경제)의 창출이고 가치의 생산 과정이다. 그런 차원에서 (불법)복제 혹은 정보의 공유와 확산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노동이다. 현행법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노동 개념으로는 이용자노동 같은 것을 곧바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화산업, 정보산업의 여기저기서 지금까지 노동이 아니었던 우리의 어떤 활동, 놀이가 노동이 되고 있다. 대략 반 세기전부터 가사 일을 가사노동으로 달리 불러왔듯이.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복제 행위와 정보공유 놀이가 노동(자)성을 인정받게 되는 된다는 것도 끔찍한 일일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자유로운 어떤 활동이 본격적으로 (임)노동의 굴레에 들어가는 제도화를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프로게이머’가 그렇듯이. 따라서, 불법복제 혹은 p2p 파일공유 활동이 점차 (임)노동으로 포섭되는 과정에 대한 저항 역시 우리가 해야하는 또 다른 노동과의 연대의 방식이다.

참고한 것

  • “Technology and below-the-line labor in the copyfight over intellectual property,” Andrew Ross, American Quarterly, vol. 58, no. 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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