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여 쓴 책을 그냥 '퍼주는' 사람들'이라니?" 다른 견해] 비판

이야!

인적이 드문 이 곳에 비교적 긴 반론의 글이 거의 처음으로 올라왔다. 수동 트랙백으로!

뭐랄까… 이 자체로 보람이 느껴지는 “풀뿌리 기술문화 연구“활동!

사실, 오병일님과 저작권 체제에 대한 이메일 토론이 있어왔고 자연스럽게  블로그로 번진 것인데, 그래서 완전 익명의 세계에서의 토론은 아니지만, 토론의 지속은 정말 의미 깊다. 이 온라인 토론의 과정이 오로지 정보(공유)운동의 확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한 일임을 스스로 다시 새기면서…

불행하게도 다른 사정이 있어 단상 정도로만 “다른 견해“에 대한 비판을 적어보기로…

IT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 환경 – IT나 지재권 고유의 문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노동 문제

이전의 우리의 주장은 이런 인식을 극복하자는 얘기였다. “노동운동적 과제”만이 아니라 정보(공유)운동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나 이 전 글”(이라니)”에서 양자가 상호 연결되는 문제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고, 이번에도 충분히 하기는 힘들지만, 바로 이 문제가 우리가 정보(공유)운동의 확장과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인식적 변화로 생각하는 부분이라는 점을 먼저 명확히 하고,

몇 가지 논점을 적으면,

  • 마침, “다른 견해“의 moya님 댓글(2010/09/07 13:48)에 있는, “궁극적인 질문”은 “정보/지식을 누가 소유/이용하는가”라는 지적이 정확하다고 본다. 누가 소유하는가의 문제가 이 체제에서 핵심이고, 정보기술(IT) 산업이나 문화산업 등이 바로 그 정보와 지식의 생산 – 유통 – 소비 – 그리고 소유의 가치사슬을 가진 산업인데, 이 때 정보(공유)운동은 소비나 유통만 보겠다고 하기 때문에 두 운동이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가치사슬의 인위적 분리 인식과 함께, 또 하나의 분리가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 사회가 여러 영역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최대한 분리, 분할, 분업 – 곧 찢어서 그 생산 관계를 유지하려는 운동이다. 노동운동과 정보(공유)운동의 분리는 지금껏 효과적으로 지켜져온 듯 하지만, 정보자본주의의 성격이 강화될 수록 그 깊은 연관성도 다양하게 드러날 것이다.
  • 지재권 일반이 그렇지만 특히 저작권 체제을 구축하기 위한 여러 필요조건 중 결정적인 하나는 저자(성)의 구성이다. 저자는 저작권 체제를 지탱하는 사고 체계로서 노동가치소유론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즉, 정보/지식의 주인이라곤 없었던 그 이전 역사와 다르게 이제 그 주인이 어디선가 나타나줘야 저 사고체계에 기반을 둔 자본의 운동이 정보/지식에도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해서 가치 생산해서 그 가치를 소유한다는 그 사람이 현실 속에서는 둘로 나눠져 있다. 노동분업에 따라 기획/실행, 정신/육체, 알고리즘/코딩 등으로 나눠진 샴 쌍둥이(?). 즉, 저작권에서의 저작자 혹은 저자는 ‘노동자 = 자본가’라는 역설을 품고 있는 사례들 중에서도 아주 노골적인 경우라 하겠다. 위의 두 분리는 극복의 조건이라면, 이것은 분리를 시켜야하는 과제이다. 매개의 문화정치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가능하다.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와 같은 임노동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문화 생산-유통 모델…

문화/정보 자본이 독점적인 문화/정보 상품의 공급자가 되고 일반 대중들은 그것의 소비자로 관계맺는 방식이 아니라, 공유지(Commons)의 확장을 통해 창작자이면서 수용자가 상호 교류하는 관계 모델

크리에이티브 커먼스(이제부터 CC로, 그리고 그 이용허락제도를 CCL로 줄임)에 대한 비판은 지난한 일인데, 무엇보다도 CC가 의미없다는 부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철저한 비판만이 그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입장임을 반복적으로 드러내야 하겠다. 일단 하나의 비판만…

  • CC는 자유문화나 되섞기(remix) 등을 통해 창작자와 소비자가 기존의 노동분업(생산-소비분업)을 극복하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CC가 아니어도 그렇게 되어왔고, 그 기축이 되는 CCL은, 결과적으로 소비자의 창작 참여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한다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창작자가 자기 생산물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사실상, 기존의 생산 관계랑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소프트웨어의 그누 일반공중문서(GNU GPL)은 저작 인격권을 유지하고(문화적으로) 그 첫 순간에는 생산자가 이용허락을 선택하거나 안하거나의 문제지만, 일반공중문서를 단다는 것은 이제 (생산자의 통제를 벗어나) 소비자-이용자에게 무려 4가지의 자유(학습, 이용, 수정, 재배포)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생산의 공유지를 구글과 같은 자본이 전유하는 문제는 별개의 쟁점이지만, 그러한 새로운 관계 모델이 자본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이 역시 저 위의 분리 문제처럼, 별개의 쟁점이 아니라 상호연관된 문제이다. 지재권 체제(저작권 체제)에서의 생산 관계는 업무상이나 직무상의 임노동 관계와 동시에! 소비자의 생산자화를 통한 사회적 생산 관계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미디어(사회적관계맺기사이트 – SNS)가 그 사회적 공장이라고도 불린다. 어쨌든, 구글이 수(십) 억의 이용자 정보나 이용자 생산 정보에 대한 전유하는 사업모델 역시 저작권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당연히, 자본에 의해서만 통제되지 않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이전과 이후 어떤 것보다 인터넷을 사랑해왔는데, 점점 자본에 의한 통제가 강력하다. 그 자본 통제 영역과 자본 비통제 영역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긴장과 경합의 관계로서 대체로 비통제 영역이 통제 영역으로 가는 경향이 커져온 것이 아닌가.

임노동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문화 생산-유통 모델은 다양한 형태일 수 있다.

비영리적 창작/공유행위의 확대(문화 창작 행위가 전업적인 창작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모두가 지식/문화 창작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다양하면 좋다. 지재권 체제의 모순 해결이 정보/지식 생산의 임노동 관계에서부터 꼭 해결되라는 법은 없으니 그 외부에서부터 “모두가 지식/문화 창작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하면 좋다. 그런데, 바로 현재의 자본의 운동이 원하는 것도 그러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주의하자는 것이다. CC가 그 활동가들의 의도와 정반대로 자본의 운동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러길 원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따로 노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주장은, 그런 임노동 관계를 벗어난 모델들이 임노동 관계 하의 정보/지식 생산 과정과 구조에 상호작용하면서, 그 과정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외재적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 자유소프트웨어와 CC의 그러한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명 다르다.
  • (지배적인 정보/지식의 생산양식이 임노동 관계, 자본주의적 영리추구,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문화인) 현재 구조에서, 비상업성은 상업성에 종속되기 쉽고 반영리나 반상업이 아닌 이상 그렇게 종속되는 과정에 저항의 기제는 별로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운동의 지점은) 상업적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바로 이 차원에서 자유소프트웨어는 기본이 상업허용인데, CC는 상업금지도 있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CC의 적용은 상업금지 쪽이다. 자유소프트웨어의 기본인 상업허용은 그러나 철저하게 동일조건을 따르라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이것은 자유소프트웨어의 공유지가, 기업들이 가져다가 전유하더라도, 스스로 확장하는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장치이다. 반면, CC의 상업금지는 그냥 그 자체의 독립적 선택이고, 이  때 역설적으로 상업금지는 변형된 형태로 상업적 전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 평상시에 이상하다 생각해 왔는데, 영어로 하자면 non-commercial을 왜 영리금지라는 우리말이 대응해온 것일까. 엄격히 구분해야 될 것들인데: 사유화 ≠ 상품화 ≠ 영리화 ≠ 상업화
  • 덧불여, 이러한 자유소프트웨어와 CC에 대한 이러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혹시 그 대상의 차이를 무시한 것은 아닌가? 하지만, 소프트웨어와 음악이나 영화의 차이는 상업 허용이나 금지와는 별 상관 없다고 보고, 개작과는 관련이 있겠지만 이 역시 역사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유문화론의 또 한 명의 법학자인 벤클러가 제안하듯이 모듈성과 분극성 등에 따라 그 창작과정을 잘 디자인 한다면, 음악이나 영화, 혹은 그 어떠한 문화생산물도 소프트웨어 같은 공동체적 역할 분담, 곧 협력적 또래생산이 가능하다.
  • 결국, 자유소프트웨어와 CC의 차이를 그 대상물 자체의 고유의 특성을 보다 중요한 것, 1차적으로 보기 보다는, 각각이 어떤 생산 관계를 상정하거나 전망하느냐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더 1차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에 설명한 것들이 많이많이 부족하지만, 일단 급한대로 이 정도 하고, 이것보다는, “다른 견해“에 달린 moya님 댓글(2010/09/07 13:48)이 보다 직접적인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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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

 
  • [...] 주장 중 “소프트웨어(즉, 실용적인 저작물)가 아닌 저작물”이라는 표현이 있다. 실용적이라는 성격이 왜 부각되는지, 그것이 음악이나 영화 갈은 [...]

  • moya 님의 말:

    해ㅋ// CCL과 GPL의 차이/비교는 매우 흥미롭군요. ㅎㅎ 자본마저 홀리는 시스템 ㅋㅋ

    antiropy// ‘철학적’인 것이 뭔가 현실과 분리된 동 떨어진 논의라는 늬앙스를 풍기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저자’를 어떻게 인식해왔느냐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주로 생산된 것이 상품이 되는 영역에서 ‘저자’ 개념은 매우 강력하게 다가오더군요. 문학이나 음악이 대표적인 듯. 반면에 생산된 것이 상품이 안 되는 경우, 예컨대 과학적 논문의 경우 ‘저자’의 늬앙스가 문학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의 공헌에 대한 오마쥬 정도로 그의 이름을 표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런 종류의 지식생산은 뭔가 공적인 지원 혹은 사적이라도 아무튼 지식생산과는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라서? 또는 정말로 그것들은 참조와 참조를 엮어서 인류의 지식에 한 줌 더하는 것이라서? 아무튼. 물론 또 그것들 중에서도 특허/돈/상품과 관련있는 지식은 뭔가 다르게 취급되는 것 같아요. 대표적인 케이스가 ‘황우석’ 그는 과학자이지만, 또 얼마나 대단한 저자였던지. 허구의 ‘원천기술’을 가졌었던. 그래서 우리 모두 그를 ‘저자’로서 추앙했던 것이 아닐까요.

    [답변]

    해ㅋ의 답변:

    CCL과 GPL의 차이/비교는 더 진척시킬 건데, 그러면서 자유SW와 오픈소스SW와의 차이/비교도 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이거 엄청 큰 주제들입니다. “자본마저 홀리는 시스템”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는데, 홀릴 뿐만 아니라 꼼짝달싹 못하게 하려면 더더욱 말입니다.

    [답변]

  • antiropy 님의 말:

    우선 moya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을 달았으니 참고하시구요.

    노동운동의 과제와 정보운동의 과제가 어떻게 상호 연결될 수 있을지는 고민해봐야할 문제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 당시 형성되던 IT 노조들과 잠시 관련을 맺으며 고민해온 바 있지만, 열악한 환경의 IT 노동자에 대한 노동운동 차원의 연대 이상의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습니다. 좀 더 보완된 해ㅋ님의 글을 기대합니다.

    다만, “이 때 정보(공유)운동은 소비나 유통만 보겠다고 하기 때문에 두 운동이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앞서 제 글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정보공유운동이 새로운 생산-유통에 대한 모델에 대한 고민으로서 단지 ‘소비나 유통’에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요?

    ‘저자(성)의 구성’ 부분의 설명은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저자’라는 허구의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인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둘로 나눠져 있다는 것인지?

    저자 관련해서는 두가지 고민이 듭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철학적 의미에서 ‘저자’란 존재하는가? 저자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등등..
    또 하나는 저작권 체제에서 실제 저자(창작자)와 투자자(자본)이 분리되고, 저자의 이름으로 사실은 투자자들이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 이때 투자자에 대비해서 실제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얘기할 경우, 앞서 얘기했던 노동주체로서의 저자를 인정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해ㅋ님은 어떻게 해석을 하시는지요?

    CCL은 창작자가 자기 생산물을 통제하는 방식이고, GPL은 소비자/이용자에게 자유를 준다? 그럼, CCL도 여러 옵션을 없애고 GPL과 같은 방식을 취하면 해결되는 문제인 건가요? 그리고 글 아래에서 적용 대상의 차이는 CCL과 GPL의 차이에 있어 비본질적이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까요? 일부 협력적 또래 생산이 가능한 저작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증가할 수 있다고 해서, 소프트웨어(즉, 실용적인 저작물)가 아닌 저작물이 협력적 또래 생산 방식으로만 생산되어야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지재권 문제와 구글과 같은 정보자본의 정보 전유 문제는 이후에 계속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저는 여전히 구글 자본의 작동방식이 저작권을 전제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데, 극단적으로 저작권 시스템이 없어지면 구글은 망한다? P2P가 대신할 것인기 때문에? 구글이 이용자의 정보를 전유할 수 있는 기반을 P2P가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임노동 관계를 벗어난 모델들이 임노동 관계 하의 정보/지식 생산 과정과 구조에 상호작용하면서, 그 과정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외재적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예컨데, 자유 소프트웨어의 성장이 해당 영역의 독점 소프트웨어 시장을 대체함으로써 약화시키는 것이 (현재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그러한 작용의 하나이지요. 제가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연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답변]

    해ㅋ의 답변:

    ** “열악한 환경의 IT 노동자에 대한 노동운동 차원의 연대 이상의 어떤 연결고리” **
    이것이 우리 주장의 한 핵심이고, 기대해주신 것처럼 보완해서 다시 토론하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지재권 체제와 정보운동의 맥락뿐만 아니라 진보넷을 비롯한 한국의 정보통신운동의 역사에서(사실상 세계적인 경향이 크게 다르지 않는 듯 한데), 노동정보운동의 쇠퇴는 참 큰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중후반과 00년대 초(중)반까지 한편으로 노동자 정보네트워크의 구축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감시의 문제 등이 활발하게 의제화되고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왜 이렇게 쇠퇴하게 된 것입니까.

    ** 정보공유운동이 새로운 생산-유통 모델에 대해 고민하는데, 단지 ‘소비나 유통’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그러느냐? **
    저작권법 1조의 저작권 보호와 문화의 향상 발전의 강조, 공정이용의 보장, 검열로 기능하는 저작권의 문제 등의 사안들이 주로 그랬기 때문이고, 그와 동시에 전체 생산과정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비와 유통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중요한데, 큰 공백이 있어왔다는 문제제기일 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산업 내 노동과의 연결고리는 정보(공유)운동이 연구하고 분석하고 의제로 프로그래밍해야 하는 운동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산-유통-소비의 가치사슬은 사회 전체의 지배적 생산양식을 말씀 드렸던 것이고, 아마도 말씀하시는 정보공유운동의 “새로운 생산-유통에 대한 모델에 대해 고민”은 그 외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배적 생산양식에서의 생산과정의 문제가 공백이었다고 봅니다.

    ** ‘저자(성)의 구성’ **
    이도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실제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 요구가 “노동주체로서의 저자를 인정”으로 이어진다 하신 것은, 명쾌한 지적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질적인 창작자에 대한 보상운동(이를테면 공정분배)이 문제라고 했던 저자(성)는 그래도 냅두거나 오히려 그 문제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 이는 저작권체제의 대안의 구성과도 연결될 텐데, 이 문제까지 해서 다시…

    ** GPL과 CCL의 차이 **
    GPL과 비교해서 CCL이 한계가 있으니, CCL을 GPL처럼 만들면 되는거냐고 하시면, 뭐라해야 할까요? 우리는 CCL을 GPL처럼 만들자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서 대답이 궁색해지는데, 일단 회피하고, 이 역시 따로 계속 그 차이를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CCL을 개선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체 정보(공유)운동을 위한 과정에 그 1차적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 “협력적 또래 생산 방식으로만 생산되어야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
    이 질문 역시 왜 하게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애초 ‘협력적 또래 생산 방식’은 일반 문화생산물의 창작방식도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과 유사해질 수 있다는 차원이었을 뿐인데. 반면, 우리가 워낙에 재개념화할 것으로 생각하는 “또래 생산 방식”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은 냅두고 그 외부에 있는 독립적인 “생산-유통에 대한 모델” 실험 정도가 아니라, 지배적인 생산양식을 대체하는 그 대안으로서 고려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 질문에 굳이 답하면, ‘그렇다’입니다. p2p재단(blog.p2pfoundation.net)에서 이에 대한 온갖 조사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 지재권체제와 정보자본 **
    이 문제도 심화 토론을 계속…
    저작권이 없어지면 구글은 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가 전제하고 있는 정보 사유화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구글이 이용자의 정보를 전유할 수 있는 기반을 P2P가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셨는데, 역사적으로는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다: p2p를 구글이 전유했습니다. 이를 다시 p2p가 대체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쪽인데, 그냥 구글의 대안이 p2p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구글 등의 문제에 분석과 비판, 그리고 대안의 정교화를 위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 지배적 생산과정과 외부의 독립적 생산과정의 연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
    네, 동의하는 지점은 좋은데, 이러한 연관성의 인정이 왜 정보산업, 문화산업 내부의 노동문제(지배적 생산과정)와 지재권(혹은 그 대안 모델)의 연관성으로 이어지지 못하시는 것인가요?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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