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농장: “1회 포럼_정치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의 鬪|合” 후기

무엇보다도 이러한 활동과 토론과 연구를 위한 자리가 계속 되면 좋겠고, 계속 되도록 일손을 보태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첫 번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에 대해 아쉬웠던 점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우선, 토론하면서 여러 분들이 제기한 몇 가지 질문들, 고민들:

  1. 2008년 촛불 등 네티즌 행동[온라인 행동주의] 이후 우리의 얘기와 방식이 낡았다는 자의식과 강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2. 누구에게 이런 얘기들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3. 성명서를 계속 열심히 쓰는 게 중요한가, (행동주의를 넘어서는 행동주의들을 보고 있는 지금) 나의 블로그를 열심히 쓰는 게 더 중요한 활동인가?
  4. 우리의 주제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내는 행동을 위한 것인가, 이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의미있는 운동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인가?
  5. 현장 예술/활동가와 직업적 예술/활동가들 사이, 예술가들과 미디어 활동가들 사이에 접점이 왜 안 생기는가?
  6.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왜 현재의 저항 방식을 탐색하는데 끌어들여져야 하는가? 맥락: 행동 주체와 그 조직화의 기반인 제도 형태들이 변화해 왔는데..
  7. 아방가르드에 대해 회의적이다. 새로운 걸 만들었다기보다는 미술계 외부의 것을 끌어와서 가져다쓰면서 아방가르드로 불리고 그렇게 아방가르드 예술이 된 것인데…
  8. 대중운동 얘기하는 것부터 대중운동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당신은 대중이 아니란 말처럼 들리는데 그러면서 어떻게 대중을 얘기하는가. 사실은 우리 모두 대중의 일부인데…
  9. 예술과 정치가 서로 섞이기 힘든 제도적 장벽들, 경계들

발제문: “행동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 예술 행동이 필요한/의미를 갖는 현재 맥락에 대한 논의 없이 예술활동가  ‘정신’에 대한 강조로 별 얘기할 게 없었다.

발제문: “베를린 아방가르드 – 다다 실험의 현재사적 의미”에 대해

  1. 베를린 아방가르드의 현재적 의의로서, 그리고 지금 우리의 저항 방식의 형태로서: “예술, [미디어,] 기술,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삼투하는 접점”(이광석)이 제시되었는데, 그러나 자본 혹은 디지털 자본주의가 이런 접점들을 앞서 마련해 왔다. 창조산업과 같은 것…
  1. 감시 권력의 비가시성 = 기술의 비가시화

    “부유하는 권력은 점점 더 ‘비가시’권으로 숨어든다. … 권력이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권력이 작동한다. .. 폐쇄회로TV … CCTV 경찰본부…”라고 쓴 부분;

    마찬가지로 점차 후기-디지털 환경으로 가면서 기술 자체가 비가시적권으로 숨어들고 있다. 온갖 기술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환경 그 자체로 되고 있다. 편재하는 계산(ubicomp)이 그렇다. 전파인식(RFID) 태그가 그렇다. RFID 태그가 모든 사물들에 붙여지고 통제사회(만)을 위한 ‘사물의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구축된다면, 감시 카메라 없이도(혹은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가 위치정보, 물류정보, 교통정보, 소통정보 등이 자동으로 기록되고 분석되어 손쉽게 감시당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하나의) 저항으로 통제를 위한 비가시적인 기술을 가시화시키고, 집단적 통제를 해나가는 방식이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즉, 미디어를 이용해 권력과 자본의 문제적 내용에 대한 비판과 패러디(포토몽타주나 정치적 UCC)를 만드는 것과 함께, 미디어와 그 기술 자체가 갖는 형식에 대한 비판과 가시화 – 사회적 통제 전략이 필요하다.

  1. ‘자본주의 재전유’의 고리를 어떻게 벗어나기?

    “일상의 저항 미학이 상품의 적대적 요소가 아닌 구성적 요소로 흡수된다(이동연, 2002. “상품미학 비판과 감수성의 정치”, 문화과학29). 이와 같은 아방가르디즘의 치명적 위기로 다가오는 자본주의적 혹은 제도적 포획과 포섭은, 지속적으로 ‘전술미디어’ 혹은 ‘컬쳐 쟴’이라고 얘기하는 기업과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전술과 새로운 미디어 행동주의 형식들을 기획하는데 상당한 헛점으로 기능한다”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저항 방식을 탐색하는데 현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환기되는 베를린 다다의 포토몽타주는 그에서 자유롭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형식이었는가, 어떻게 그러했는가? 하지만 그것은 이후 상품 광고 기법으로 재전유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적대적 요소가 구성적 요소로 전화되는 상품(화) 미학의 논리 – 전유와 포획의 반복 고리를 깰 수 있는 형식에 대한 창안이 필요한 셈인데, 결과적으로 한시적일 뿐인 ‘적대적 요소’가 정세적으로 필요할 때도 여전히 있겠고(카메라 고발), 동시에 상품(논리)의 ‘구성적 요소’가 아닌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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