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트윗되지 않는다” (트위터의 광고 혁명은 빼고!)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와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오갔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힐끗 봤고, 진보블로그 중 <블로그 안팎 이슈>에 모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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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08년 이란에서 부정선거로 폭발된 대중투쟁에서 한 번 크게 ‘트위터 혁명’ 얘기가 있었는데(당시 미국 정부의 ‘트위터 혁명’에 대한 지원이 기억난다), 국내에서는 어떤 계기들도 이런 얘기가 나온건가(그 때처럼 어떤 정치적 맥락이 있는 것인가, 혹 지난 6월의 지방선거 정도라면… 트위터와 지방선거라는 글도 있고.)

사실, 보다 넓게는

“사회운동세력이 가져야 할 시대 인식”과 같은 접근이 가진 근본적 시대 인식의 문제들을 생각해봐야 한다. 차차[차]~

이런 논의들이 바다 건너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것들만 몇 개 간추리면,

클릭행동주의(clicktivism)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그리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사회적 미디어와 사회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혁명은 다운로드되지 않는다” 등에 이어 “혁명은 트윗되지 않는다”(Why the Revolution Will Not Be Tweeted)고 할만 하다.

이렇게 이미 넘쳐나는 논의들이 있지만 굳이 몇 마디 보탠다면,

매개의 정치에 주의하고 주목해야 하겠다. 즉, 사회변화 혹은 혁명은 일반적인 차원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만서도, 특히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도구(와 공간)들과 결부되어 저런 이야기가 될 때는 그것들이 갖는 매개성, 혹은 기술의 정치(학)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와 혁명의 대상이다. 예전의 용어법을 쓰자면,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내용만 사회변화이고 혁명이 아니라 그 형식도 그러느냐가 못지 않게 중요하다. 트워터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의 진보적 변화를 위한 조직화와 집단행동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 그런데 그 와중에 정작 그 트위터 자체(기술)가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도구이자 공간이자 형식이라면, 우리는 비록 덜 효과적이고 볼품 없더라도 다른 도구와 공간과 형식을 갖는 사회변화의 길을 찾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리고 이미 그런 대안들은 무수히 많다.

또 하나는:

인터넷의 그 무수한 대안 중의 하나로 봉기넷(riseup.net)이란 곳이 있다. 미국(시애틀) 소재의 국제적 기술집단인데,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나중에 자세히 한 번 다루기로 하고.) 이 봉기넷의 첫 화면 제일 밑에 보면,

인터넷은 이제 그만, 거리에서 만나요!“(Get off the internet, I’ll see you in the streets!)

물론, 인터넷 전체가 거리로 나가는 것을 조직하는 도구일 수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기술적 코드’로 붙박힌) 이 도구의 기능은 거리로 못나가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거리로 안 나가가도 뭔가 조직되고 변화되는 것 같은 도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워낙에 인터넷이라는 전자적 정보네트워크를 통해서 사회가 굴러가도록 구조변동(정보[자본주의]사회)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거리의 의미는

(집단을 이뤄 시위하는) 거리의 정치이겠다. 그러나 사회변화가 시위의 형태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공간적으로는 온갖 군데가 될 수 있고, 이때 거리가 은유하는 것은 직접성이다.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직접성이다.  민중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피투피(p2p)와 같은 관계.

그에 반해, 간접적인 것, 즉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것들은 우리를 완전 가깝고 친밀하게 – 초단위로 서로에 대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 만들더라도, 그것들은 매개된 것이다. (물론, 봉기넷도 p2p 기술도 마찬가지다.) 거리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점점 미디어에 의존해왔고, 사회적 미디어까지 왔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 유지, 발전 그리고 사회적 변화까지도 이들 도구에 그렇지 않을 것들까지도 의존하게 하는 문제가 있겠다. 수많은 일들, 오히려 점점 더 많은 일들이 거리에서 집단을 이뤄 한 목소리도 외치고 싸워야 할 일들이지만, 온라인에서의 서명과 리트윗 한 번으로 대신하게 되면 어쩌나.

그렇다고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이 도구로 내가, 우리가 뭘 하든 (사회변화를 조직하고 혁명을 꾀할 때도) 지속되는 매개의 문화정치경제적 조건들이 있고, 우리가 원하는 변화(의 기획)는 이 문제들까지 아울러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최근에 트위터의 새로운 광고 방식이 시작되었다고:

흥미로운 방식일듯한데, 트위터에 대한 그리고 광고에 대한 것이니만큼 이미 어딘가에 더 잘 분석된 글이 한글로 있겠거니 하고…

한 가지만 더 보태면,

사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처음부터 친구를 잘 맺도록 함과 동시에 친구를 팔아먹도록 부추기는 모델이다. 그 기술이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친구’나 ‘사회적 관계’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것들과 깊은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꼭 그와 동일한 것은 아닌 변형된 개념이자 실천들이다. 학교다닐 때 알던 친구와, 트위터에서 좇는자(follower)가 되거나 페이스북에서 친구먹으며 아는 사람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면이 있는 것이다.

하여간, 이런 돌연변이의 친구와 사회적 관계를 팔고 사는 것이 기본모델이었으니, 저런 광고 자체는 새로울 것도 없다. (정보자본의 한 분파가 시도하는 새로운 자본축적의 한 형태로서)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들여다볼 필요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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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

 
  • 해ㅋ 님의 말:

    아!
    위에 링크한 글들 중에서 “Small Change : Why the revolution will not tweeted”에 대한 논평이 여기에 있네요:
    “소셜 미디어와 사회운동”( http://netuuk.g3.cc/295 )

    [답변]

  • nina 님의 말:

    와… 챙겨서 읽어봐야겠어요.
    질문이 있는데, Schmictivism 이 뭔가요. +_+

    [답변]

    해ㅋ의 답변:

    저 말이 들어간 글에도 설명이 없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별 신경 안 썼는데, 질문하시니까 저도 급 궁금해지면서…
    저 말이 들어간 글을 쓴 이한테 한 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답변]

    nina의 답변:

    구글의 CEO Eric Schmidt 의 이름을 딴 것?

    [답변]

    해ㅋ의 답변:

    네, 그런 것도 같네요.
    “슈미트주의”라… 좀 더 구체적인 뜻이 있을 것도 같은데, 저 말이 들어간 글의 필자는 답이 없고…

    [답변]

  • 2010/10/05 1386호…

    야식배달에 대한 이념적 소비의 가능성은? 진보정치가 이 땅에 꽃피우게 되면 올빼미처럼 밤을 새우며 야식배달로 연명해야 하는 어떤 영세자영업자들의 생체..행인 이십대, 내게 돌아보기가 가능할까?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쓰여진 플랭카드가 다시 생각하니 참 수세적이 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건..현신 걷다 -2010년 10월 전투기 소음 때문에 국방부에 항의 전화했다가 국민으로서 분단된 현실을 생각하라는 훈계를 들었던 일이나 미류 한 작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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