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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문화연구가 위기인 모양인가..

올 여름에 문화연구 (자체)에 대한 학술행사가 두 개가 있다. 문화연구가 뭔가 할 게 있다는 취지의 행사가 두 개나 있다는 것은 뭔가 하나의 현상인가, 문화연구의 위기와 같은?

하나는 문화연구학회 학술대회이고, 또 하나는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생)들의 문화연구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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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문화연구: 연구의 개입, 개입의 연구”

일시: 2009년 7월 10일(금요일) 오후 1시 – 6시 15분
장소: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문과대학(서라벌홀) 8층 첨단강의실(2854호)

■ 제 1부 –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백승욱(중앙대 사회학과): 역사적 맥락에서 본 신자유주의의 위기
강내희(중앙대 영문학과/문화연구학과): 신자유주의와 문화변동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신자유주의 위기와 대안사회를 위한 문화적 모색

사회: 유선영(한국언론재단)
토론: 육영수(중앙대 역사학과/문화연구학과)
장시기(동국대 영문학과)
정준영(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 제 2부 – 신자유주의와 상징적 저항: 촛불 1년을 돌아본다

김성일(문화사회연구소 소장): 폭력의 진실 – 518과 촛불시위에서의 폭력담론
권경우(중앙대 강사, 문화사회연구소): 집단지성의 반지성주의
김성윤(중앙대・한예종 강사, 문화사회연구소): 약소자 정서와 약소자 되지 않기

사회: 이광석(중앙대 강사, 언론학)
토론: 김영선(고려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하승우(한양대 연구교수/지행네트워크 운영위원, 정치학)
문강현준(위스콘신대(밀워키) 영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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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캠프2009
위기의 시대, 문화연구의 저항은 있는가?

올해로 일곱 돌을 맞는 문화연구 캠프가 이번 여름 광운대학교에서 <위기의 시대, 문화연구의 저항은 있는가?>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입니다. 그간 문화연구캠프는 문화연구의 내적인 반성과 전망, 새로운 지식 창출과 교류, 사회적인 참여와 실천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며 젊은 연구자들이 학문과 우정을 교류하는 중요한 장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이번 캠프의 주제는 ‘저항’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위기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지적 · 실천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원천적 동력으로서 저항의 사고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문화연구의 생명은 정치적 권력에, 자본의 힘에, 상식의 질서에 대해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의 세계를 상상하고 구현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번 캠프를 통해 그간 우리가 담론의 풍성함에 젖어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실천적 감수성과 용기를 잃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현실의 안이함에 젖어 비판적 담론을 발굴하고 구성할 성찰적 진지함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함께 반성하며 생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문화연구캠프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에 관심있는 학부생, 석박사 대학원생들의 논문 발표 및 토론을 주축으로 하여 진행되고, 문화연구자와 대학원생들이 문화연구의 정체성, 의의, 정치성에 관해 함께 난상토론을 벌이는 시간이 함께 마련됩니다. 특히 세션 후에는 문화운동, 문화비평, 문화이론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오신 김창남 선생님의 기조강연과 다채로운 놀이마당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행사 일정에 관한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시: 2009년 8월 18일 수요일 오후 1:00 ~ 밤 11시 예정
* 장소: 광운대학교
* 논문 주제:
1) ‘위기의 시대, 문화연구의 저항은 있는가?’와 관련된 주제의 논문
2) 자유 주제

* 논문발표: 7월 15일까지 김승수(연세대 대학원생) 010-9697-0307, ps0307@naver.com에게 논문 제목과 요약문(100-150자)을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채택된 논문의 발표전문 제출일은 8월10일입니다.

기타 문의사항은 문화연구조직위원회에 문의주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젊은 상상력과 도전력이 어우러지는 2009년도 문화연구캠프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바랍니다.

문화연구캠프 조직위원회(나미수, 이기형, 이상길, 이영주, 이희은, 임종수, 김예란) 드림

관련 글:

해커운동: [자본주의 해킹하기] 서문

해커문화, 해커운동 – 그것의 한 형태인 자유/오픈소스소프트웨어운동에 대해 자율주의 맑스주의 관점으로 분석한 책이 있다:

(스웨덴 출신인데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일단) 요한 소더버그. 2007. 자본주의 해킹[하기]: 자유/오픈소스소프트웨어운동., 루틀리지

책표지

Johan Söderberg. 2007. Hacking Capitalism: The 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FOSS) Movement. Routledge.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자율주의 맑스주의 관점을 해커공동체나 해커운동에 적용하기보다는 반대로 해커운동의 최근 성과인 자유/오픈소스소프트웨어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율주의 맑스주의 이론을 갱신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니 이 책을 쓴 사람이 기대한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를 평가받는 것일 테고, 이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따져볼 일이 하나 있는 셈인데, 그걸 따져보려면 그 이론과 현실(운동) 모두 잘 알고 있어야 하므로 나에게 당장은 쉽지 않겠다.

그런 부담없이 해커문화, 해커운동, 자유/오픈소스소프트웨어운동에 대한 (많이 없었던) 맑스주의 분석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자율주의 맑스주의 관점이 어떻게 현실 운동, 그것도 성공적인! 기술운동 사례 분석에 적용되는지, 자율주의 맑스주의 관점이 적합한지 등을 궁금해하며 좇아가 보는 것도 재미가 있겠다.

저 출판사 사이트에 나오는 이 책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자유/오픈소스소프트웨어운동(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FOSS)은 노동이 어떻게 생산을 자기조직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 산물의 하나인] 그누/리눅스(GNU/Linux)라는 자유 운영체제는 세계적인 기업의 [독점] 운영체제와 경쟁할 정도이다. 이 책은 해커운동의 [이러한] 최근 성과를 통해 프리드리히 쉴러, 칼 맑스, 허버트 마르쿠제, 안토니오 네그리와 같은사상가들의 희망을 탐색한다. 아래로부터의 기술 발전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정치적 행동주의를 탐색하는 첫번째 책인 셈이다.

진짜 재밌을란지.. 일단 서문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 프랑스 혁명 이후 섬유 산업에 도입된 방직 기계인 베틀(직기: loom)에 사용된 천공카드(perforated card)가 소프트웨어의 기원이 되는데, 이 혁신에 반대하는 수공 직조 장인들이 반발하는 태업(sabotage)이 있었다. 이런 태업은 마침 작업장이 최초로 계산기화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섬유산업의 기술 혁신 과정에서 기술거부(공포증, Luddism)가 생겨났다(1).
  • 기술에 대한 저항으로서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거부라는 그 말 뜻 그대로 해석되어 왔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긍정적인 기술 개발을 하기 위한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과 오늘날의 해커운동을 비교하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양자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기술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투쟁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은 자본주의 기술 발전에 저항하며 투쟁한/하는 역사 주체이다. 그런데 러다이트와 다르게 해커는 스스로 다른!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1-2).
  • 해커공동체, 해커운동은 노동관계 조직화의 대안적 모델로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들 ‘노동’ 주체는 자발적으로 그 관계에 진입하고 집단적인 노동 활동을 조직한다(2).
  • 쉴러와 마르쿠제의 미적 놀이, 충동, 재미를 위한 혁명 등은 소스코드와 놀이를 벌이는 이들 해커,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노동에서(도) 발견된다. 저자는 이를 ‘놀이투쟁’(play struggle)으로 부르고 있다. 그 정치학은시장 교환의 제약 외부에(임노동 관계의 외부에) 노동의 자기조직적 구성 권력이 있다고 본다. 컴퓨터 – 기계의 배치는 노동 통제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바로 그 기술에 대해 노동 자율성이 형성된 것이다. 해커라는 유령!(2-3)
  • 해킹, 해커는 (주류 미디어와 정치경제 권력이 이를 당연히도! 범죄시하여 생긴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컴퓨터 기술을 비전문가들에게 접근 가능하게 하는 활동이고, 기업과 정부가 독점해온 연구 개발(R & D)을 깨고, 기술 발전의 원리를 규제해온 사회적 노동분업을 침식하고 있다. 이는 그누/리눅스(GNU/Linux) 자유 운영체제라든가 파일공유를 위한 또래간(p2p) 네트워크 등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4).
  • 이 책은 해킹을 프리즘으로 해서 지적재산권 체제, 컴퓨터, 인터넷, 네트워크된 자본주의 등을 탐색하고자 한다. 자유/소프트웨어 역사나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에 대한 현장 기술지가 아니고, 명사로서의 해커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해킹(hacking)에 관심이 있다(5).
  • 기존의 맑스주의 논의는 해커 정치학이나 해커운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5). 이 책은 자유/소프트웨어운동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을 통한 분석이 아니다. 반대로 네트워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킹을 통해 맑스주의 이론을 재검토 하기 위한 것이다(6). 전통 노동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그 노동)은 우리의 ‘노동’ 성격에  대한 관념과 노동자계급 구성에 대해 새로운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다(6).

대충 이 정도로 정리하면서 빼먹었지만 중간중간에 흥미로운 지적들도 있다. 그리고 이 서문에 이은 각 장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나오는데, 이는 목차를 적는 것으로 대신한다.

  1. 해커운동의 배경
  2. 후기-포드주의 관점에서의 자유/소프트웨어 개발
  3. 정보의 상품화
  4. 정보재의 소비와 욕구
  5. 정보 생산
  6. 네트워크 경제에서 시장과 선물
  7. 해커의 놀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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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농장: “1회 포럼_정치 예술과 미디어 행동주의의 鬪|合” 후기

무엇보다도 이러한 활동과 토론과 연구를 위한 자리가 계속 되면 좋겠고, 계속 되도록 일손을 보태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첫 번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에 대해 아쉬웠던 점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우선, 토론하면서 여러 분들이 제기한 몇 가지 질문들, 고민들:

  1. 2008년 촛불 등 네티즌 행동[온라인 행동주의] 이후 우리의 얘기와 방식이 낡았다는 자의식과 강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2. 누구에게 이런 얘기들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3. 성명서를 계속 열심히 쓰는 게 중요한가, (행동주의를 넘어서는 행동주의들을 보고 있는 지금) 나의 블로그를 열심히 쓰는 게 더 중요한 활동인가?
  4. 우리의 주제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내는 행동을 위한 것인가, 이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의미있는 운동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인가?
  5. 현장 예술/활동가와 직업적 예술/활동가들 사이, 예술가들과 미디어 활동가들 사이에 접점이 왜 안 생기는가?
  6.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왜 현재의 저항 방식을 탐색하는데 끌어들여져야 하는가? 맥락: 행동 주체와 그 조직화의 기반인 제도 형태들이 변화해 왔는데..
  7. 아방가르드에 대해 회의적이다. 새로운 걸 만들었다기보다는 미술계 외부의 것을 끌어와서 가져다쓰면서 아방가르드로 불리고 그렇게 아방가르드 예술이 된 것인데…
  8. 대중운동 얘기하는 것부터 대중운동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당신은 대중이 아니란 말처럼 들리는데 그러면서 어떻게 대중을 얘기하는가. 사실은 우리 모두 대중의 일부인데…
  9. 예술과 정치가 서로 섞이기 힘든 제도적 장벽들, 경계들

발제문: “행동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 예술 행동이 필요한/의미를 갖는 현재 맥락에 대한 논의 없이 예술활동가  ‘정신’에 대한 강조로 별 얘기할 게 없었다.

발제문: “베를린 아방가르드 – 다다 실험의 현재사적 의미”에 대해

  1. 베를린 아방가르드의 현재적 의의로서, 그리고 지금 우리의 저항 방식의 형태로서: “예술, [미디어,] 기술,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삼투하는 접점”(이광석)이 제시되었는데, 그러나 자본 혹은 디지털 자본주의가 이런 접점들을 앞서 마련해 왔다. 창조산업과 같은 것…
  1. 감시 권력의 비가시성 = 기술의 비가시화

    “부유하는 권력은 점점 더 ‘비가시’권으로 숨어든다. … 권력이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권력이 작동한다. .. 폐쇄회로TV … CCTV 경찰본부…”라고 쓴 부분;

    마찬가지로 점차 후기-디지털 환경으로 가면서 기술 자체가 비가시적권으로 숨어들고 있다. 온갖 기술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환경 그 자체로 되고 있다. 편재하는 계산(ubicomp)이 그렇다. 전파인식(RFID) 태그가 그렇다. RFID 태그가 모든 사물들에 붙여지고 통제사회(만)을 위한 ‘사물의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구축된다면, 감시 카메라 없이도(혹은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가 위치정보, 물류정보, 교통정보, 소통정보 등이 자동으로 기록되고 분석되어 손쉽게 감시당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하나의) 저항으로 통제를 위한 비가시적인 기술을 가시화시키고, 집단적 통제를 해나가는 방식이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즉, 미디어를 이용해 권력과 자본의 문제적 내용에 대한 비판과 패러디(포토몽타주나 정치적 UCC)를 만드는 것과 함께, 미디어와 그 기술 자체가 갖는 형식에 대한 비판과 가시화 – 사회적 통제 전략이 필요하다.

  1. ‘자본주의 재전유’의 고리를 어떻게 벗어나기?

    “일상의 저항 미학이 상품의 적대적 요소가 아닌 구성적 요소로 흡수된다(이동연, 2002. “상품미학 비판과 감수성의 정치”, 문화과학29). 이와 같은 아방가르디즘의 치명적 위기로 다가오는 자본주의적 혹은 제도적 포획과 포섭은, 지속적으로 ‘전술미디어’ 혹은 ‘컬쳐 쟴’이라고 얘기하는 기업과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전술과 새로운 미디어 행동주의 형식들을 기획하는데 상당한 헛점으로 기능한다”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저항 방식을 탐색하는데 현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환기되는 베를린 다다의 포토몽타주는 그에서 자유롭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형식이었는가, 어떻게 그러했는가? 하지만 그것은 이후 상품 광고 기법으로 재전유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적대적 요소가 구성적 요소로 전화되는 상품(화) 미학의 논리 – 전유와 포획의 반복 고리를 깰 수 있는 형식에 대한 창안이 필요한 셈인데, 결과적으로 한시적일 뿐인 ‘적대적 요소’가 정세적으로 필요할 때도 여전히 있겠고(카메라 고발), 동시에 상품(논리)의 ‘구성적 요소’가 아닌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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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문화: 카피레프트운동과 해커공동체의 유리

아직 본격적으로 파보지 않았지만, (한국의) ‘카피레프트운동’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를 반저작권운동, 반자본주의운동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아무래도 리차트 스톨만, 로렌스 레식 등의 자유주의적 운동의 영향 때문이겠다. 전자의 경우,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자유시장 논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후자는 오히려 그것을 위해 자유문화를 주창하고 있다. 물론, 주창자들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최근 레식의 블로그에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레식의 입장이 어떻든 그런 논점들이 생기기 마련인 모양이다. 하여, 자유소프트웨어운동이나 자유문화를 주창한 사람들의 사상이 어떻든 우리의 맥락에서 창조적으로 변용하면 좋은 일이다.

애매하게 넘어간 위의 몇 가지 문제들은 나중에 자세히 정리해 보기로 하고…

한국의 해커문화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혹은 범죄사회학의 입장에서만 연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해커공동체의 정치사회적 특성’을 밝힌다는 논문이 있어 반갑게 찾아 읽었다.

윤여상. 2001. 한국 해커공동체의 정치사회적 특성 연구.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 논문. 여기서 전문을 볼 수 있다: http://korea.gnu.org/people/chsong/yys

경험적 연구 방법으로 한국의 리눅스 이용자들, 자유소프트웨어운동가들, 네트워크 해커들에 대한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 특성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런 만큼 풍부하고 정교한 한국 해커문화에 대한 현장기술(지)가 되고 있지는 못해 아쉽다. 그와 무관하게 그 결론 중의 하나가 상당히 흥미롭다. 한국의 카피레프트운동이 그 기원과 지향의 차원에서 그 실천가들이라고 할 해커(공동체)와 연관을 맺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진단을 하는 대목이다.

정보연대가 카피레프트를 정보 생산자 네트워크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한 것은 옳은 것이며 카피레프트의 중심지인 GNU/FSF는 핵심적인 정보 생산자 네트워크일 것이다. 따라서 정보 운동으로서의 카피레프트는 정보 생산의 중요한 실천자인 해커들과 연관성을 가져야 했으나, 이 실천자들을 도외시하고 이론적 자원만을 가져와 지적 재산권 철폐 운동에 결합시킴으로써 적극적인 실천자를 잃어버린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모호한 상태에서 제대로 확산되지 못했다. 정보 운동의 일환으로 카피레프트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카피레프트를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에서 넘어 해커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커들과 유기적 연계를 가지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5) 대안적 정보 운동으로서의 카피레프트의 수용과 변용‘ 부분, 밑줄은 인용자; 아래 역시)

결론 부분에서도 다시 언급되는데,

카피레프트가 GNU/FSF와 리눅스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해커들이 바로 카피레프트의 핵심적인 실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과는 유리된 운동으로 전개됨으로써 실천자 없는 운동을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권력 또는 대안적 사회체제 문제와 관련하여 진보적 정보 운동 단체들과 해커공동체들의 연계 활동이 요구된다.

이 논문에서는 딱히 한국의 해커공동체가 적극적인 자기 정치이념을 형성하지 못한 원인이 본격적으로 규명되고 있지는 않는다(외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카페레프트운동(권)에서 그들을 정치적 주체화하는 기획을 갖지 못한 것을 진단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카페리프트운동에서는그렇게 하지 않/못했을까?

나의 추측은 이렇다: 위 연구자가 “우리나라의 경우 좌파적 진보 진영에서 반저작권 운동의 일환으로서 스톨만의 카피레프트를 이론적 기반으로 받아들여 좌파적 정보 운동과 결합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학생 운동과 좌파적 진보 진영의 침체와 맥을 같이 한다”고 진단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당시 학생 운동과 좌파적 진보 진영 일부가 카피레프트운동을 주창하고 나설 때, 그들의 운동권 문화가 해커문화와 잘 조응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부족하나마 자유소프트웨어 혹은 공개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해커들도 없지 않았던 것 같고 네트워크를 침입하는 실력을 가지면서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해커가 없지 않았을 텐데, 공통의 이념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조직화나 운동/실천의 방식에서 서로 궁합이 맞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지금도 운동권의 조직 문화는 그것이 맞서 싸우려는 권력이나 시스템을 닮아 있으니, 당시 운동권의 입장에서는 개인주의 문화를 갖기 보통인 해커공동체를 운동 주체로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이 한국의 카페레프트운동(사)와 해커문화에 대한 진단을 받아들인다면, 한 가지가 설명되고, 한 가지 과제가 생긴다.

북미, 남미, 유럽 쪽에서는 비교적 활발한 (정치적) 해커운동, 해커행동주의가 한국에서는 왜 찾아볼 수 없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 “GNU/FSF의 자유소프트웨어운동과 GPL이 새로운 정보 운동의 수단으로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추세이며 핵티비즘[해커행동주의]이 네트워크 해커공동체들의 새로운 이념으로 부상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경우 “리눅스 공동체와 네트워크 해커공동체 모두 독자적인 해커 이념을 확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결론)는 것이다.

당시 카피레프트운동 (주체들)이 해커공동체를 (정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주체로 인식하고 일정한 조직화 작업을 했더라면 좋았겠다. 사실, 이는 지금도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저 논문의 주장처럼 당시 당시 카피레프트운동은 그런 인식이 없었던 것인가? 나의 추측처럼, 일단의 인식이 있었다 해도 서로 뒤섞일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말 유리되었던 것인가?

과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실천가’들은 해커들로 국한되지 않는다고 본다. 여전히 해커들, 특히 해커행동주의의 주체들이 (운동 집단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저작권, 특허권 등이 정보의 공유, 지식의 확산, 자율적인 문화/생활을 광범위하게 옥죄고 있고 이에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다양한 풀뿌리 주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네티즌, 이용자, 또래(p2p) 등

따라서 지금의 카페레프트운동은 해커공동체, 네티즌, 이용자, 또래와 함께 실천적인 반저작권운동, 반자본주의운동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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