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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점거농성 참여하세요(미국 캘리포니아대학, 2010.10.7)

교육의 공공성, 특히 돈벌이 기계가 돼가는 대학 교육의 공공성을 위한 싸움이 계속 되어왔는데 …

그 일환으로 10월 7일 오후 2시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웹사이트의 총장실(http://ucop.edu/)에 대한 가상 점거농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0월 월 7일 공동행동의 날 – http://october7thecd.wordpress.com/

가상 점거농성에 대한 설명은 여기 – http://www.underconstriction.net/7oct/action/ 혹은  http://aaaaarg.org/action

농성은 -

http://www.underconstriction.net/7oct/action/action.html 혹은 http://aaaaarg.org/action/action.html 를 통해 접속하시고 계속 사이트 접속을 유지하시면 됩니다.

virtual sit-in today!

In solidarity with the October 7th Day of Action for Public Education we call for a virtual sit-in of the websites of the Office of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nd the UC Regents. Go HERE to participate in the action while you read 

 

@ http://occupyca.wordpress.com/2010/08/05/strike-on-october-7th/

관련 글:

영화·음악·게임·SW는 여간해서 훔칠 수가 없다: 불법복제는 도둑질이 아니다!

모든 창작은 모방이예요, 그니까 복제는 도둑질이 아니죠!라고 외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많아지고 있지만,

워낙에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이 풀뿌리 복제문화 때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퍼뜨려온 “불법복제 해적질은 도둑질이다”라는 강요된 ‘상식’은 아직 ‘상식’이다. 더 나아가, 불법복제하면! 도둑, 악마, 그리고 이제 “사라집니다”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불법복제 해적질은 도둑질이다”의 미국판으로서 그  대표적인 캠페인 광고는 “… 훔치지 않겠죠!”(“You wouldn’t steal a…”, 2004)인데,

유튜브에서 이용약관 위반으로 “사라집니다” 되었고, 대신 호주판인 “영화 해적질은 범죄다”(Movie piracy, It’s a Crime)가 아쉬운대로 아래에 있다… (근데 내 기억으로 아래의 내용이 “… 훔치지 않겠죠!”였던 것 같기도 한데!?)

보다시피,

상점에서 DVD 케이스를 자기 옷속에 숨겨서 훔치는 장면이 나오고, 곧 개인용컴퓨터에서의 영화 파일 다운로드가 완료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즉, (불법)복제는 도둑질이라서 범죄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법복제는 도둑질이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의 불법복제 해적질의 대상인 영화, 음악, 게임, SW 등은 여간해서 훔칠 수도 없다!!!

요새도 물론 저렇게 상점에서 음악 CD, 영화 DVD라는 “물건”을 몰래 훔치는 일들이 있겠지만, 혹시 이것이 큰 손실을 입혀서 그렇게 난리를 치는 거라면 모를까, 개인용컴퓨터에서 영화 파일 다운로드가 문제라면 그것은 훔치는 것이 아니다. 저작권법 위반일 가능성이 있을랑 말랑 하지만, 적어도 절도나 도둑질이 아니다!

마침 이런 주장을 하는 글이 있어

그 주요 주장만 간추려 보자면,

SW를 하나 복제하면 원본은 그대로 있고, 내가 갖는 복제본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아는 훔친다는 말은 여기에 적용 안 된다. 실제로 나는 어떤 것을 창조했다. 하지만, 저작권을 침해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불법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조건에서 복제는 창조다. 혹은 복제는 (재생산이자 동시에) 생산이다. 이 명제는 앞으로 계속 다듬어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합법적 복제본에 대해 지불할 돈을 “효과적으로” 훔친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적으로 상당히 맞는 듯 하다. 더군다가 그 소프트웨어나 문화생산물을 내가 만들었다면, 나는 정말이지 내가 만든 것을 도둑맟았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지만 보다 널리 많이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퍼뜨리고 확산시키는 (간접적이거나 미래의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이 바로 자유복제 해적공유이다. 계속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이다.

그런데, 위의 당장의 금전적 손실에 대한 계산에 대해서도 보면,

물론, [불법복제 하지 않는다면 정품을] 살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상업적 판매자에게는 손실일 수 있다. … 이용자는 그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처럼 사용되지 않은 돈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그저 관념적일 뿐.

바로 그런 관념으로 영화의 경우, 무료 다운로드 1회 = (입장료) 8,000원 피해! 라는 초현실적인 등식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적질은 “저작권 위반”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저작권은 시간제한적이고[보호기간이 있고 그 후에는 자유이용], 국가가 부여한 독점임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독점이 일반적으로 나쁜 일임을 받아들이므로, 저작권 침해는 독점에 대한 침해일 뿐이다.

그 뒤에 “개인적이고 비상업적인 사용 위한 우리의 공유를 막는 것은 마치 헌 책을 내맘대로 못팔거나 친구에게 주지 못하게 막는 것이랑 똑같다”면서 공유가 아름다운 의무이기도 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계속 되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위 글은 소프트웨어(SW)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데, 디지털 형태로 존재하는 문화생산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위의 단순하지만 상식에 기댄 설명에서와 갈이, “불법복제 해적질은 도둑질이다”라는 ‘상식’은 우리가 아는 도둑질의 상식에 비추어 상당히 비상식적이다. 더 나아가, 풀뿌리 복제문화를 찬성하고 진흥하려는 쪽에서조차 이런 상식과 비상식이 뒤섞여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추석에 불법 다운로드 받으라던 덕담에서도 그 비유가 잘못되었다.

“길을 걸을 때 바닥에 최신 헐리우드 영화 DVD가 길바닥에 널려 있”고 이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는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떨어진 것을 줍는다는 비유가 훔친다는 비유와 본질적으로 같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고, 그러다 보니 그것이 주은건지 훔친건지 판단하기 애매한 문제로 불필요하게 논쟁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 글은 (실리거나 옮겨진 – 참세상이나 이글루스에 붙은 댓글들이 웅변하듯) 비교적 선전했지만, 그 비유 때문에 효과가 많이 반감된 것이다.

하여간,

그래도 여전히 불법복제는 도둑질? 누군가 뭔가를 훔친 것? 이라는 의심이 계속 든다면, 맞다. 아닌게 아니라 그런 일이 있다. 그것은 문화생산물과 정보생산물의 소비-이용 과정에서가 아니라(있기는 있지만 크지 않고), 바로 그 생산 과정에 있다(여기서는 거대한 범죄조직처럼 체계적이이다)! 그래서 질문은,

사실, 훔친 것은 누구이고 무엇이 도둑맞은 것인가?

까지 나가야 한다.

나는 (예를 들어 영화의 경우) 이용자들이 불법복제 해적질하기 전에 영화 자체가 이미 영화제작노동자들의 피땀과 피눈물, 그리고 소비자들의 혈안(대량의 관심과 주목)을 “훔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할 참인데, 차차[차]~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이제 끝내야 하는데 하나만 더 굳이 보태면,

위의 이야기는 물건을 훔치는 것과 디지털 파일을 복제하는 것과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인데, 이 때 반드시 주의할 것은 정보예외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여간해서 힘들다는 점이다.

디지털 정보는 다르다, 정보는 물질과 다르다, 정보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다 등이 그것인데, 정보도 그렇고 물질(의 희소성) 역시 문제는 사회적 (생산)관계가 더 결정적이고, 디지털 정보 형태가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던, 100년도 훨씬 전에 푸르동이라는 사람은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관련 글:

나쁜 자본주의, 좋은 자본주의, 오픈소스(소프트웨어)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이라는 기업이 있다. 아마도 세계 1위를 달리는 미국 소재의 군산복합체이다. 불황을 모르는 미국의 어느 산업분야에서 그 회사가 돈버는 법에도 있듯이.

전쟁으로 돈벌이하는 기업! 곧, 사람이 죽어나가야 이윤이 창출된다. 무기가 팔리려면, 세계 곳곳에서 전쟁까지 가면 좋고, 최소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야 한다. 천안함도 가라앉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사영화된 군대(민병대?), 혹은 “사적 용역 군인 (Private contractors)이 12만 명이나 있었다 한다. <이라크 판매: 전쟁 돈벌이꾼들>(IRAQ FOR SALE: The War Profiteers)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용역 군인의 기업들을 다루고 있다.

전쟁만이 아니다. 죄를 짓는(보다 정확하게는 자유형의 유죄 판결을 받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돈벌이가 되는 감옥 기업들도 있다. 민영화, 두 가지 접근법에 있어서 꼭 사영화가 나쁜 건 아니라지만, 나쁜 감옥기업의 이윤창출 방식을 끔찍하다. 판사를 매수하거나, 형기를 늘리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사랑 이야기>(Capitalism : A Love Story)에서 이 사영화된 교도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여간,

전쟁 돈벌이꾼 중의 하나인 록히드 마틴이 하고 있는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이거야! 흐름”(Eureka Streams, eurekastreams.org). 기업을 비롯한 조직에서 활용할 만한 소셜 미디어 사회적 미디어, 혹은 사회적관계맺기사이트(SNS)를 구축할 수 있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다.

다른 한편,

이들 나쁜 자본주의와 반대로 좋은 자본주의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착한’이나 ‘윤리적’ 혹은 잘 구별해야 하지만 ‘공정’ 이라는 말이 붙은 것들: 착한 기업, 윤리적 소비, 공정 무역, 공정 여행, 착한 자본, 착한 투자, 착한 금융, …

사회적 공헌도 많이 한다고 하지만, “북미 최대의 공정무역 인증 커피 구매회사임을 자랑”하는 스타썩스, 혹은 스타벅스를 보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생각나요.

구글은 현금이 넘쳐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기금에 투자하기도 하고, 아!그리고 M$의 빌 게이츠는 2005년에 아프리카 빈곤을 걱정하였고 (자기 통장에 있는 4백 65억 달러에 비하면 껌값이지만) 무려 7억 5천만 달러를 “국제예방접종백신동맹”에 기부한 바 있다. 그러면 빌 게이츠, 세상의 구원자?

무엇보다도,

착한 기업, 착한 자본의 흐름에 있어서 신기원을 연 것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아닐까. 소프트웨어의 소스를 공개하는 것이고 그러는 것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더 좋게 만드는데 참여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프트웨어를 저렴하게 나눠 쓸 수 있다. 그것을 지원하거나 나서서 개발하는 정보기업들이 수두룩하다. M$ 빼고는(M$도 얼핏 비슷한 걸 한다고도 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이 오픈소스(소프트웨어)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투자자이자 개발자가 되어왔다 (왜? – 여러가지 배경이 있는데, 하나의 핵심은 독점하고 있는 M$와 경쟁하기 위한 유력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기업들 뿐만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 정부들도 지원하고 있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소프트웨어산업만이 아니다. 그와 긴밀히 연관된 인터넷 문화산업 전반으로 확산되어왔다: 웹2.0!

이제와 보면, 오픈소스소프트웨어는 착한 자본을 위한 착한 소프트웨어라고 부를만하다.

자유소프트웨어는사회운동이고, 오픈소스소프트웨어는 개발 방법(일뿐)이라고 리차드 스톨만이 말했지만, Hacking ideologies: Open Source, a capitalist movement(Toni Prug)의 지적처럼, 오픈소스소프트웨어 역시 사회운동이고, (다만) 자본의 사회운동이다.

나쁜 자본주의와 좋은 자본주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쁜가?

그런데, 오픈소스(소프트웨어)는 왜 나쁜 자본주의와 좋은 자본주의 모두에 가 있는 것인가?

덧불여,

좋은 거는 좀 좋다고 맞장구 처주고 해야지 말야, 좋은 자본주의쪽의 그나마 좋은 사례들까지 여전히 자본주의니까 난 춤 못추겠다고 비판하면, 도대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어떻게 대안을 만들어가냐? 그러나,

춤 솜씨가 뛰어나도 리듬이 안 맞으니 흥이 안 나는 걸! 그나마 나은 것에 몸을 맡기고 만다면, 그만큼 우리가 보다 급진적인 대안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탐구가 부족한 탓은 아닐까. 그건 특별한 일이나 활동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생활 속에 있고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는데 주류/지배적 방식이 아니다보니 점점 그걸 잊거나 모른 채하는 것이다.

아마도 다시 이름을 바꿀 듯 한데,

여기 풀뿌리 기술문화 연구집단의 목적이 바로 그런 대안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자는 것인데, 사실 지금껏 좀 게을리했다. 이제 슬슬 수없이 널린 대안들을 천천히 서둘러 탐색해 보자. 혹 …

관련 글:

웹2.0기업(구글, 페이스북 등)은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

구글, 페이스북 등 총칭해서 웹2.0기업은 일차리 창출, 특히 청년실업을 해소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그에 기생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들은 잘 나간다. 수 억 명을 고용하고 있는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는 이들 기업에 고용되어 월급받는 노동자들이 했을 일을 이제는 회원가입한 수 억 명의 월급 안 받는 이용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이 문제를 계속해서 그리고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는데, 다소 알기 쉽게 설명한 글이 하나 있길래 주요 부분만 정리해본다: “cognitive slaves[인지적 노예],” Global Guerrillas, 2010.9.23. (경유한 곳: p2pfoundation.net)

특히 젊고, 실업 혹은 불안정노동 상태의 맹렬이용자(superuser)가 그들이다.

페이스북은 현재 250억 미국 달러 이상의 시장가치가 매겨지고 있다. 이는 5억 명의 시간제 이용자 중에서 10만 명 이상의 맹렬이용자가 바로 그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도구(페이스북)의 근간이 되는 핵심 네트워크를 발생시킨다. 이들의 헌신적인 이용, 고도의 연결성, 그 충성도는 해를 거듭하는 페이스북 성장의 성장 동력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그야말로 물질(자원)이고 노동이고 그리고 또 페이스북이라는 일괄조립공장의 생산물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노력에 대한 댓가를 받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나 친지들을 위해 부를 창출한 것이 아닌 것이다.

노동에 대한 보상이 없단다. 정작 필요할 때 우리 저작권 정의는 어디로 도망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은 어느정도의 부인가?
우리가 그 맹렬이용자에게 페이스북 가치의 4/5를 떼어 보상해 준다고 친다면(구글의 경우도 수 백만 명의 맹렬이용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고),
그 도구 관리자들에게 50억 미국달러는 챙겨주고도,  각 맹렬이용자들은 이 도구(페이스북)에 기여하는 것만으로도 20만 미국달러(약 2억원 이상)의 소득을 얻는 것이다. [내가 잘못 보고 번역했거나, 필자가 잘못 계산했겠지~]

미래의 산업이 이러한 인지적 노예 [구조]에 기초한다면, 우리 모두가 루저가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보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게 끝인데, 마지막에 두 가지 단서를 단다:

‘노예’라는 용어에 대해:

‘임금노예’라는 말과 가까운 언어적 장치이다. 외부적인 압박에 의해서 나의 의지에 반하여 어떤 것을 강제로 해야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 압박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의 사회적 연결성에 부여하는 가치가 클수록 더 커진다.

맹렬이용자들의 노동에 대해:

이는 TV 시청과 다르다. TV시청은 수동적이다. TV 시청자는 그들이 보는 TV 쇼나 콘텐트를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시장화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두 가지 단서가 문제를 안고 있다.

  • 노예라는 규정이 이상하다. 저런 이유로 노예라고 한 것은, 어감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페이스북 쓰는 내가 노예라고라고라?), 저 위의 정의에 따르면 현실과 잘 안 맞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맹렬이용자들은 스스로가 봐도 주위에서 봐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하는 외부의 압박 같은 것은 없어보인다. 그 강제적 압박이 사람들이 사회적네트워킹에 가치를 더 부여할 수록 더 커진다는 자발성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게 여전히 외부에 있고 강제적이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맹렬히 반대하는 이용자들이 많을 것이다. (‘노예’적 속성은 다른 차원에서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자발적으로 하고 있지만,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서서히 어떤 신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압박들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미디어 미학의 문제인데, 차차[차]~)
  • 그리고 TV시청의 문제는, 아시다시피! 이제 저 웹2.0 기업들이 TV까지, 이전의 낡은 미디어까지 저와 같은 방식으로 바꿀려고 하고 있으니 다르다고만 할 게 아니다.  애플TV, 구글TV, … 이제 TV시청자도 적극적으로 된다! 그니까 이게 신문 방송 따로 인터넷 따로 하던 이전의 구분도 없어지면서, 전체 미디어산업의 가치생산 방식이 구글스럽게(게걸스럽게), 페이스북처럼 바뀐다고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는 것.

어쨌든

페이스북의 시장가치가 (돈놓고 돈먹는 금융자본의 농간이 일정 부분 있다쳐도) 저렇게 천문학적인 지경이 된 것은 수 만에서 수 십만의 이용자들(이 만든 어떤 관계 정보들)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내가 뭔가 쓰고 올리고 한 것이 누군가를  떼부자 만드는 일이라고 하고, 나는 노예 혹은 적어도 웝급도 안 받는 무상노동자였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극히 일부의 떼부자들을 빼고) 우리 모두가 망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가?

이에 적절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터넷(모바일 포함)을 사용하는 (짧게는 지난 5년간 급격히 변해온) 경험에 대해 찬찬히 뒤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고, 또

이론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현실을 설명해줄 나와있는 이론들을 공부하고 적당한 것이 없다면 개발해서(정보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해킹!)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많은 공부가 있을텐데, 여기에도 하나의 공부모임이 있다: 정보자본주의비판 – 공부모임 [ https://we.riseup.net/infocapital ]

그런데 이러저러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나면,

  • 인터넷기업들로부터 우리의 무료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자?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게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지만 유일한 대안이 아니고 더 나아간 대안들이 만들어져야한다.

특히 이 보상 요구의 방식이 갖는 문제는, 이미 그런 식으로 사업모델을 만들어 가고있는 기업들이 있고, 이들을 보건대 대안이기는커녕 저와 같은 네트워크노동의 착취 방식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는 듯 하다. 그래서,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노동의 극단적인 형태들이 점점 인터넷을 노동시장이자 (벽없는) 공장 삼아 쏟아져나오고 있는 이다. 댓글 알바, 혹은 기름땀 짜는 디지털노동은 그 중의 일부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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