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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인가?’ 더 나아간 공정이용으로..

‘공정한 사회인가?’

외교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서인가?

(19세기말 미국을 알고부터 미국을 큰 형님으로 모시는 자들이 있었다 하니) 이 부처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부처의 운명은 이미 언제나 대한민국 정부에 있는 미국의 부처였다고 봐야겠다.

사실 다른 부처라고 큰 차이 있겠냐 싶은데, 그 장관의 자기 딸 특채건은 국가(기구)의 사유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책도 법도 사유화되고 있는 마당이라 그런 사사로운 거래도 이제 스스럼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이 일을 두고 우리 사회가 “과연 공정한가”라는 의문이 대대적으로 던져진다.

저작권의 횡포에는?

아직 대대적인 질문은 없지만, 공정이용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왔다.

공정이용

공정이용은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지 않고도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는 저작권법상의 예외 정도가 아니라,

저작권자(콘텐츠 유통자본)의 이윤창출을 보호하느라, 즉 돈 놓고 돈 먹는 그 돈을 주로 보호하는 법이라 교육과 문화의 온갖 자연스러운 풀뿌리 공유 방식들이 태풍에 가로수 뽑히듯 작살나고 있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를 묻는 말이다. 저작권 체제의 공정성을 따지는 출발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 법에는 있으니 우리도 저작권법에 공정이용 조항을 넣자거나 문화 관련 부처와 지배 정당까지 나서서 너무 심했다는 듯이 공정이용가이드라인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감사히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다.

공정이용은 마치 저작권(법) 상의 몇 가지 예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공정한 저작물의 이용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공정이용이 저작권법의 대부분의 조항을 차지하고, 저작 재산권이 (굳이 필요하다면) 예외적인 조항으로 몇 가지 포함되는 식이 되어야 한다.

공정이용을 우리가 아는 대로만 적용하는 것은 부족하고, 공정이용에 대해 공정하지 못한 처사다!

‘더 나아간 공정이용’ 같은 것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공정이용은 출발점이라고 했듯이, 출발 이후 어딘가로 더 밟아나가야 한다. 공정이용은 출발점이지만, 공정이용에서만 그치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공정분배, 공정생산으로 이어져야 한다. 공정이용, 공정분배, 공정생산의 개념화는 차차(차)…

일단, 주어진 조건에서 공정이용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몇 가지 보여주는 것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브라질의 저작권법 개정 작업이 주목된다! 이는 곧…

관련 글:

히틀러는 공정이용을 싫어해! – 비판적공유지(Critical Commons)

또 하나의 CC가 있다: 비판적공유지(Critical Commons).

지금 이 사례가 중요한 것은, ‘강의자료 저작권’의 대학 기습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술정보공유운동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비판적공유지(http://criticalcommons.org)는 미디어(콘텐츠)를 교육과 학술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공정이용이라고 보고, 웹사이트를 통해 실제 그런 식의 이용을 하고 있다, “미디어문화에 대한 공정하고 비판적인 참여를 위해.”

예를 들어, 미국 남가주대학의 한 대학원 수업에서 “들뢰즈와 영화”에 대해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때, 그 강의안과 함께 들뢰즈가 그의 영화론 책에서 언급하며 분석하고 있는 영화들의 관련 부분(클립)을 온라인 동영상으로 함께 볼 수 있다: Deleuze and Cinema

예를 들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의 일부를 볼 수 있고, 들뢰즈가 이에 대해 언급한 내용,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보거나 달 수 있다: Seven Samurai and Deleuze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웹사이트를 만드는데 사용한 도구도 자유소프트웨어라는 점. 플론(plone)이라는 온라인콘텐츠관리도구(CMS)를 가지고 비디오 공유 사이트 만드는데 최적화시킨 플루미(plumi)가 그것이다. 참조: 대안적 비디오공유사이트 FOSS1: 플루미!!!

위의 플래쉬 비디오도 어도비 말고, (거의) 자유소프트웨어로 된 비디오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히틀러는 공정이용을 싫어해!”라고 이름 붙여지기도 했던 한 비디오가 지난 4월이었는지 하나의 토론거리였다. 비판적공유지의 홍보물이기도 하고, 온라인 비디오 사이트들에서 비디오들이 검열로 인해 삭제되는 문제를 비판한 패러디물이다.

hitlerFairUse

비디오 보기: Digital Humanities and the Case for Critical Commons (유튜브)

관련 글: Of Memes and Media Takedowns

앞서 들뢰즈와 영화라는 수업을 위해 들뢰즈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 <7인의 사무라이>의 배급사 등에 모두 허락을 받거나 돈을 내면서 이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겠는가?

들뢰즈나 그를 도운 연구자들, 구로사와 아키라를 비롯해 당시 영화 제작 스텦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가는 방법은, 그들의 책과 영화를 이용해 비평하고 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해 내기 위한 교실에까지 찾아와 문 두드리며 수금하러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저작권  때문에 우리 모두의 교육권과 학습권이 심각하게 침해된다면,

유치원생부터 초중고 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강사, 교사, 교수, 그리고 학부모까지 비판적 공유지를 만들어 보자.^^

비판적공유지는 단적인 사례일 뿐이고, 그 외에도 인류 모두를 위한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공유하기 위한 운동은 열린접근(Open Access) 운동을 비롯해서 여럿 있다.

관련 글:

방시: “석유가 새어나온다면 그걸로 화염병을 만들자!”

영국의 브링튼(Brighton) 부두가에 설치된 낙서예술 활동가 방시(Banksy)의 설치.

제목: “부두 압박”(Pier Pressure)

비디오에는 잘 안 나타나지만, 아래 사진을 보면:

그리고, 방시의 영국석유회사(BP)의 멕시코만 석유유출에 대한 낙서!

“삶이 우리에게 새어나오는 석유를 준다면, 그걸로 화염병을 만들자!”

http://www.banksy.co.uk

관련 글:

“힘들여 쓴 책을 그냥 ‘퍼주는’ 사람들”이라니?

힘들여 쓴 책을 그냥 ‘퍼주는’ 사람들, 2010. 08. 15

출판된 책을 온라인으로도 자유롭게 공유하는 사례는 반가운데, 저 제목은 문제적이다!

그 사람들이 문화산업 혹은 창조산업에서의 불안정 노동에 처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그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제목!) … 혹은 반대로, “힘들여 쓴 책[녹음한 음반/음원, 제작한 영화 등]을 그냥 ‘퍼주는’ 초국적 기업들”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읽게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러나, “힘들여 쓴 책을 그냥 ‘퍼주어도’ 먹고 사는데 크게 문제없는 사람들”의 사연이다(책을 쓰는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러나 여전히 “힘들여 쓴” 것이기는 한데, 노동가치소유론(노동이 가치를 생산하고 그 생산과정을 통제한 사람이 그 가치를 소유한다), 그 중에서 특히 소유가 강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냥 퍼주는’ 탈소유와 대비를 이루어 아름답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의 공유는 그렇게 형편이 허락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퍼주기 선택(과 그런 선택의 자유)의 문제가 된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편과 여유가 있더라도 사적으로 소유하고 독점하려들지 공유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래도 쫌 좋은 게 좋은 공유를 선택하자는 이런 운동은 상당한 의미와 성과가 있겠지만, 말했다시피 그런 조건(사적 소유와 독점) 하에서일뿐이고 기껏해야 지식 자선운동에 머문다. 지식 생산자의 맘씨좋은 선택! 그에 웃고 우는 문화에는 내가 춤출 수 없다.
지식의 사적 소유와 독점, 혹은 맘씨좋은 공유 모두에도 마찬가지로 춤 추지 못할 사람들: 이들은 혹은 우리는 아마도 형편이 닿는 분들보다 훨씬 더 힘들여 창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인데, 왜냐면 노동통제라는 것이 있는 “업무상 창작”이나 “직무상 발명”인데다 업계 특성상 일 없으면 집에 가서 뭐든 붙여먹어야 할 불안정 노동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의 공유나 정보 공유 운동이 저 사람들의 현실을 가려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사람 잡는 야근…폐 잘라낸 SI개발자“이나 “‘내가 기술유출범?’…누명 쓰는 개발자들“에게 정보 자유와 지식 공유의 해커윤리(히매넌)를 그냥 ‘퍼주듯’ 보여달라고 부탁하기는 민망하니까… (오픈소스는 앞뒤 안 가리고 한다만.)

다른 한편,

저와 같은 공유 선택은 사실, 업무상 창작이나 직무상 발명 같은 것이 아닌, 직접적인 임금 노동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독립적 창작자나 저작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있다. 창조적공유지의 텃밭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립 창작자들에게도 저런 제목은 문제적이다! 이제 독립 창작자들은 자본의 운동은 아니면서 생계 유지와 재창작을 위해 필요한 (창작물의 판매를 포함한) 수익을 구하는 활동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저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로 내가 공들여 만든 컨텐츠를 값없이 나눠줄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초현실적 질문에 따르면, 그럼 이제 창작, 창조, 공유, 나눔은 꼭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면 좀 더 좋게 되는 사람들만의 미소가 되는가?

제일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출판된 책을 온라인으로도 자유롭게 공유하는 사례는 반가운 일이고 더 많아지면 좋을텐데, 그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지가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그래서 저 질문은 다시: “진짜로 내가 공들여 만든 컨텐츠”(의 수익)을 저작권이라는 이름으로 왜 다른 법적 인간(들)이 챙겨가는 건지, 나는 맘씨 좋게 나눠줄래야 나눠줄 수 없는, 그랬다간 누명을 뒤집어 쓰거나 해적이 되는 이 추한 현실은 무엇인지?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