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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미디어에서 사회주의적 미디어로

아래의 내용은 [위키세상: 디지털 리터러시의 정치경제와 참여미디어의 약속]의 “6장. 자유의 단계들: 사회적 미디어에서 사회주의적 미디어로”을 요약한 것이고 토론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와 내용 정리의 이유는 여기: [온라인세미나제안] 디지털 리터러시의 정치경제학과 참여 미디어의 약속

이 장에서 저자들의 초점은 자유주의적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이나 사회적 미디어를 정치화하자는 것이고, 그 논리적 다음 단계로 “사회주의적 미디어”가 제시된다.
“정보사회와 더불어 정보이론의 핵심은 네트워크 자체로 복수성을 허용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총체성으로서 행위한다”(Suoranta & Vadén 2008: 157 다음부터는 쪽수만 표기)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지젝이 언급한 ‘사회적 총세성’으로서의 사회운동을 위해서는 (“들뢰즈의 리좀은 디지털 자본주의의 논리에 다름 아닌 상황을 고려할 때”[158]) 그 복수성이나 차이의 다양성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그것들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총체성에 더 파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디지털 기술은 정보적 상품의 희소성을 제거할 가능성을 주지만, 물질재들의 세계로까지 확장될 수 없”(160)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보(재)에 대한 자유소프트웨어적 접근(오픈소스)가 물질(재)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실험들도 존재한다. 이는 ‘오픈 디자인’(open design)으로 불리는데, 소프트웨어만이 아니라 하드웨어에도 오픈소스의 방법을 적용하자는 것이고, 컴퓨터 하드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에 대한 오픈 디자인이 주목받는 사례이다. 오픈디자인의 가장 최근의 현황에 대해서는 Balka, Kerstin, Christina Raasch, and Cornelius Herstatt. 2009. “Open source enters the world of atoms: A statistical analysis of open design.” First Monday 14(11). http://www.uic.edu/htbin/cgiwrap/bin/ojs/index.php/fm/article/view/2670 참조.

저자들은 ‘사회적 미디어’(social media)를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과 시각을 협력하고 공유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라인 플랫폼이나 소프트웨어”(160)로 규정한다. 반면, ‘사회화된 미디어’(socialized media)는 사회적 미디어를 위한 실질적인 도구를 말하는데, 그 이용 공동체가 소유, 유지, 관리한다. 이를테면 해커공동체에 의한 자주관리와 같은 형태이다. 3차원 애니메이션 창작도구인 블렌더(Blender)는 애초에 사기업의 독점 소프트웨어였는데, 경영상의 문제로 더 이상 개발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이용 공동체가 돈모아 구입하여 자유소프트웨어로 전환시킨 그야말로 사회화된 미디어의 사례이다(160-1). [블렌더의 사회화 과정에 대해서는 3차원 애니/게임 창작도구 - 블렌더: 독점sw에서 자유sw로… - http://hack.jinbo.net/?p=204 참조]. 그런데 저자들은 “그것으로 충분한가?”라고 묻는다. “단지 진실하고 실질적인 민주주의 혹은 지젝이 레닌을 따라 ‘실질적인 자유’라고 말했던 것(현존하는 권력관계의 바로 그 좌표를 침식하는)의 입구에 데려다주는 것 뿐이 아니지 않은가?”(161). 그에 따라 저자들은 그 논리적 다음 단계로 ‘사회주의적 미디어’(socialist media)를 제시한다(161). 이는 주어진(해당) 미디어의 소유(권), 사용, 관리(administration)가 공유된 것을 말한다.
사회주의적 미디어를 위한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으로 저자들이 제시하는 것은, ‘물질 자원의 사적 소유의 극복’(164)이다. 곧 실질적인 공공성의 확보이다. 전기 공급이 되어야 자유로운 인터넷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미디어를 위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조건이 또한 충족되어야 한다. 저자들은 이를 ‘물질적(tangible) 에너지와 자유 시간’(167)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거대 독점 자본이 이끄는 사회적 삶에서 벗어날 때 실질적으로 확보되는 것으로 본다. “국가와 시장화되는 교육 시스템에의 노예화, 기업들의 노예화로부터 사람들의 의식과 지적 자원들을 해방”(168)하는 것이다. 기존의 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해커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넘어서 실질적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기본 복지와 함께 생활(삶의) 목표와 비-물리적 필요(욕구)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168)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즉 기본 복지의 생산이 또 하나의 자본을 위한 시장이 되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집단적이고 공유된 통제”(169)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저자들은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2000, 403)에서 주장한 “사회적 임금(social wage), 시민 소득(citizenship income), 무조건의 기본소득(unconditional basic income)”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제국의 생체 정치적 맥락에서 점차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하기 힘들어지고, 시간과 가치의 측정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생체 정치적 생산의 지형 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루 종일 도처에서 일반적으로 생산한다고 본다(윤수종 옮김. 2001. 이학사: 508-9). 이러한 “생체 정치적 생산의 일반성”에 입각하여 대중의 정치적 요구는 “모두에게 사회적 임금과 보장된 수입”(509)이다. “사회적 임금은 가족을 넘어 전체 대중에게, 심지어 실업자들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전체 대중이 생산하며 전체 대중의 생산이 사회적 총자본의 관점에서 필요하기 때문”(509)이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 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활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생산 영역, 재생산 영역, 비생산 영역을 막론하고 대중 전체가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동일한 보상으로, 전체 주민에게까지 확장된 실제로 보장된 수입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권이 모두에게 확대된다는 전제 하에서, 이 보장된 수입을 이들은 “시민 소득” – 즉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각자에 대한 응당한 지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은 기술이 아니라 집합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주의적, 참여적 미디어의 구축”은 이들이 볼 때 “생산양식에 있어서, 심리적 사회적 과정 – 의식이 형성되는 것 – 이 고려”(170)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키(백과) 같은 것을 보면, 기술이 아니라 집단적인 활동으로서의 실천이다. 이러한 사회적 생산물로서의 정보와 지식은 생산 과정이자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면서 동시에 “통치와 규제의 권력을 둘러싼 헤게모니 전투”(170)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정치적 학습 및 집단적 자기 조직화가 없이는 통제받고 규제받을 뿐이다. 저자들이 위키백과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 하지만, “단순한 위키백과 참여 과정조차 비판적 학습 경험”이 된다는 점에는 그런대로 동의할 수 있다. 이를 저자들은 사회주의적 미디어 생성으로 가는 과정, 더 나아가 마르크스가 말한 ‘일반지성’의 실현과 연결시킨다(171).

[경제와 리눅스를 합친] ‘오이코눅스(Oekonux) 프로젝트’(http://en.wiki.oekonux.org/Oekonux/Introduction)를 참조해서 사회주의적 미디어의 원리를 정리하면 소외의 부재, 자기 조직화, 자발적 참여, 자발적 책임감의 부담, 상호의존 하의 자율성 혹은 사회적 자기실현(Selbstentfaltung)이 된다(174). 한 마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문화, 어떤 공유의 문화(common culture)… 사회주의적 미디어는 그러한 생기넘치는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175).

또 한 가지 강조되는 것은 ‘사회주의적 형식’이다. “사회적 미디어의 사용을 사회주의적 형식을 통해”(175) 하자는 제안을 한다. 현재의 사회적 미디어에 자본주의적 형식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형식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의식과 행위 뿐만 아니라 생산의 바로 그 형식들”(175)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레닌 그리고 지젝을 따라 다음과 같은 정식을 제안한다(175): 사회주의적 미디어 = 기본 복지 + 공유 서버(common server) + 소비에트 권력

사회적 미디어에서 사회주의적 미디어로의 이행에 대한 대안적 개념화를 위해 미디어와 교육의 차원에서 자유를 (재)고찰하는데(176), 더 큰 자유는 “경제적 조건이 갖춰진 후에 하는 게 아 니라 교환가치를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가능”(176)고 본다. 이러한 자유는 또래 사이(p2p) 혹은 제3의 생산양식, 통치양식, 재산양식 등과 연결된다(177). 본문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자유의 단계들에 대한 표4(178-179)가 이들이 말하는 자유의 재고찰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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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미디어

교육

폐쇄적(closed)

교환 가치

기업의 사업으로서의 미디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서의 교육

통제된 콘텐츠와 운반체

경제적 유용성, 콘텐츠의 통제 (사업 논리)

경제적 유용성, 콘텐츠의 통제(교육 정책)

상품화

소유하기로서의 학습

“잡종소싱”

(crowdsourcing)

고급교육 받는 시민의 평생에 걸친 교환가치

자유의

첫 단계

경제적 유용성, 제한된 협업

웹2.0

교육 콘텐츠 사업

시장 영역, 기업가 정신, 다문화적 자본주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유튜브, 구글, 시민TV, 애드버스터 등

상품화된 반(semi)대상으로서 교사와 학생(지식 생산자, 소비자_

콘텐츠의 제한된 자율성

“공유하기”

“이용생산자”

이중의

자유

사용가치 / 가치 그 자체

협업으로서의 미디어

협업으로서의 교육

콘텐츠의 전적인 자율성, 운반체의 제한된 자율성

위키, 리눅스, p2p

프레이리,

상호의존 하의 자율성(Selbstentfaltung)

“공유주의적”(commonist)

“인터넷 접근 + 소비에트 권력”

존재로서의 학습

반성적 불확실성

삼중의

자유

세계와 뗄 수 없는 가치, 아리스토텔레스적 합목적성

즉각적인 미디어 실천

“탈학교 사회”

콘텐츠와 운반체의 전적인 자율성

위키피디아 + 생태적 자율성 + 자원의 통제

행동하여 학습하기, 본래적 기예(skills)

물질주의적으로 추동되지 않는 사람의 형식의 촉진

존재론적 관점에서 “평생 학습자”이자 인간으로서의 교사와 학생

“공산주의적”(communist)

“전기 + 인터넷 접근 + 소비에트 권력”

공유지로서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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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근본독점 깨뜨리기

아래의 내용은 [위키세상: 디지털 리터러시의 정치경제와 참여미디어의 약속] 3장 “근본독점들(radical molopolies)”을 요약하며 토론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와 내용 정리의 이유는 여기: [온라인세미나제안] 디지털 리터러시의 정치경제학과 참여 미디어의 약속

이 장에서 수오란타(J. Suoranta)와 바덴(T. Vadén)[다음부터 저자들]은 이반 일리히(Ivan Illich)가 말한 ‘근본독점’(radical molopoly)을 현대사회의 정보/지식 생산과 소비의 방식들에도 적용하면서, 위키백과를 비롯한 사회적 미디어의 사례를 통해 근본독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근본독점’(radical molopoly)이라는 말은 이반 일리히(Ivan Illich)가 [공생공락의 도구들](Tools for conviviality)라는 책에서 (아마도 처음) 사용하였다.

Ivan Illich, 1973. Tools for conviviality. 1st ed. New York: Harper & Row; [성장을 멈춰라!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이한 옮김. 2004. 미토. 영어 원문은 여기서 모두 볼 수 있다: http://opencollector.org/history/homebrew/tools.html

래 디컬(radical)은 흔히 ‘급진적(인)’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이 ‘뿌리’임을 상기할 때 ‘근본적(인)’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근본(적인) 독점이라고 하면 뿌리에서부터 독점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이를 통해 일리히는 산업적 생산 양식(과 문화)이 지금껏 다양하게 존재해온 인간의 필요와 욕망의 충족 과정과 방식을 배제하면서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정한 재화의 생산과 소비 방식에 대한 독점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배타적 독점의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보면, (일반) 독점이 “하나의 기업이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의 생산(혹은 판매) 수단에 대해 배타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면, 근본독점은 “생산물의 한 유형이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의 산업 생산 과정이 간절한(pressing) 요구의 충족 [방식]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고 그와 경쟁하는 비-산업적 활동을 배제”하기 때문이다(Illich 1980: 56; 한글판 90; Suoranta & Vadén 2008: 55). 이 책의 주제와도 연관된 한 예로 (근대적) 학교 제도는 배움(학습)에 대한 근본 독점의 형태인 셈이다. “배움을 교육과 훈련으로 재규정하면서 비산업적 활동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독점은 자연스럽게 “강제적 소비, 개인의 자율성 제한, 사회적 통제”(Suoranta & Vadén 2008: 55 다음부터는 쪽수만 표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주제인 미디어에 있어서의 근본독점의 문제에 대해 저자들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지만, 미디어에서 근본독점의 문제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응답없는 일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발언의 독점 [체계]이다(쟝 보드리야르. 1998. “대중매체를 위한 진혼곡.”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문학과지성사. 192). 즉, 현대의 대량 미디어(혹은 방송 미디어)는 그 체계(system) 수준에서 발언의 독점이 이뤄지고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라면 좌파적인 관점의 언론이든 시청자 제작 참여든 그것이 미디어의 다양성이나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환상은 제공할지몰라도 그 발언의 독점 구조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의 강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본다. 조중동과 한경은 특정한 층위에서 다르지만, 근본적 층위에서 다르지 않다. 벤클러[Benkler, Y. 2000. “From Consumers to Users: Shifting the Deeper Structures of Regulation Toward Sustainable Commons.” Federal Communications Law Journal, 52(3)] 를 참조하여, 미디어 체계를 하부구조, 논리구조(코드), 내용구조(콘텐츠)의 3층위로 나눠볼 수 있는데 대량 미디어에서 발언의 근본독점은, 하부구조에 있어서는 그 소유와 통제의 문제와 연관되고 내용구조에 있어서는 특정한 내용(콘텐츠)이 담아내는 메시지와 그 미학적 형식의 문제와 연관되지만, 무엇보다도 논리구조(코드)의 층위에서 전면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발언(과 소통)의 형식이 기술적으로 언어적으로 법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일종의 미디어 장르(혹은 미디어 미학 일반)를 규정하기 층위가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코드의 층위에서 발언의 근본독점을 깰 수 있는 대안들이 더 많이 실험되고 창안되어야 한다.

저자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독점되고 있는지를 보이면서 오늘날 디지털화된 정보와 지식의 근본독점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63 전후). 추가적으로 드는 생산 비용(재생산 비용 혹은 복제 비용)이 거의 없는 디지털 정보로서 소프트웨어는 희소하지 않은 재화(정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희소한 것처럼 되어 시장에서 판매되고 구매되고 있다. 정보재에 대한 이러한 인위적인 희소성은 지적재산권(특허, 상표, 저작권), 복제방지 기술, 문서 포맷에 대한 특허, 하드웨어에 대한 특허라는역사적으로 고안된 장치들 없이는 불가능하다(63). 저자들은 개발된 나라들에서는 일상생활의 도구가 된 책상 컴퓨터(desktop) 공간이 이러한 인위적인 희소성의 창출하고 개방성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근본독점화되고 있다고 본다.

그 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인위적인 희소성의 창출이 디지털 형태의 정보(재)만 두고 벌어져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물질적인 정보(재)가 갖는 희소성은 자연적이지 않고 (국가폭력에 기반을 둔) 인위적 법제도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자칫 물질적인 재화는 자연적으로 희소하다는 점을 전제하게 되지만, (적어도 맑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모든 물질적 생산물이 갖는 희소성 역시 마찬가지의 인위적인 장치가 작동하며 보장된다. 배타적 재산 소유는 역사적 현상이며 비교인류학적으로 문화적 현상이고, 그것이 저작권 등에 의해 정보(재)에 대해서까지 적용될 때 이제까지 자연스러워보였던 그 희소성이 만들어진 인위적 과정이 가시화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로렌스 레식 등의 저작권 개혁운동가들은 디지털 형태의 정보가 갖는 특성과 그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의 적용이 갖는 모순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유시장과 시장교환은 문제없고, 오히려 자유시장을 위해 정보에 대한 배타적 독점 소유권의 부여를 반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와 지식 생산에서의 근본독점에 균열을 내는 현상들이 등장해왔고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위키백과가 그것이다. 위키 기술은 네트워크(인터넷)에서의 자유를 추구해온 역사적 흐름, 특히 해커윤리와 해커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65), 단적으로 위키백과 프로젝트(wikipedia.org)는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를 생산해온 해커 노동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위키백과 소프트웨어가 자유소프트웨어이며, 그 백과의 내용(콘텐츠) 역시 (그 인위적 희소 성을 조장해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한) 저작권(카피라이트)에 의존하면서 그것을 뒤집어(카피레프트) 재배포와 재수정의 권리를 부여하는 ‘그누 일반공중이용허락’(GNU GPL) 하에서 생산되고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의 이용허락은 ‘그누 자유문서이용허락’(GFDL: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로서 무엇보다도 그 문서 내용이 사유화되는 것을 막으면서 공유지로 유지될 수 있게 하고 있다.

저자들은 자유소프트웨어에 기초한 위키 기술과 카피레프트 이용허락의 조합이 [근본독점을 깰 잠재력을 가진] 새로운 ‘지식노동’(knowledge work) 방식을 창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66).

이 새로운 지식 생산방식에 대한 관련 논쟁으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Hardt, Michael & Negri, Antonio (2004). Multitude. London: The Penguin Press. 301ff

Žižek, Slavoj (2002). A Cyberspace Lenin: Why Not? Issue 95 of International Socialism Journal. <http://pubs.socialistreviewindex.org.uk/isj95/zizek.htm>; 슬라보예 지젝, “사이버스페이스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슬라보예 지젝, 정영목 옮김, 지젝이 만난 레닌 –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교양인, 2008

Žižek, Slavoj (2006). No One Has To Be Vile. London Review of Books, Vol. 28 No. <http://www.lrb.co.uk/v28/n07/zize01_.html >

Merten, Stefan (2000). GNU/Linux – Milestone on the Way to the GPL Society. <http://www.opentheory.org/gplsociety/text.phtml>

위키백과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 생산과정에 있어서 ‘소외없는 자발적 노동’이고 그 분배과정에 있어서 지식의 민주화이다. 저자들은 지식의 민주화로서 위키백과가 구텐베르크적 잠재력이 있다고 보는데, 인쇄 미디어와 다르게 디지털 정보이니만큼 그 규모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66).

저자들은 비판적 미디어 리터러시 혹은 페다고지의 차원에서 2가지 정치적 자유가 있다고 보는데, 내적 차원에서는 위키백과 내용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외적 차원에서는 위키백과 그 자체(whole entities)에 초점을 맞추어 발견할 수 있다(67-9). 단적으로 내용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의 역사(history 기능)을 볼 수 있고, 확정되기보다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은 별도의 토론(discussion 기능)이 이루어지는 것이 위키백과가 보여주는 이상적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일부 요소라고 본다. 그 이상적 커뮤니케이션은 근대 계몽기에 신문 미디어가 보급되면서 공중의 탄생으로 가능해졌지만, 실상 그 미디어 공론장에 공중이 없어왔다면, 이제 이러한 위키기술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70).

결 국, 위키백과와 같은 사회적 미디어의 등장은 후기 희소성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 양식, 지적 노동의 새로운 형태들의 패러다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72, 74). 물론 아직까지는 이 사회적 미디어에 접근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남성, 북미, 고학력 등으로 제한되는 지정학적 편향을 보이고 있지만 말이다(74).

덧붙여, (근본)독점과 독점문화의 문제

이 근본독점 깨기를 기획하기 위해 문화의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일리히는 “상업적 독점을 깨는 일은 독점으로 이윤을 얻는 소수만 손해를 보게 만든다. 보통, 이들 소수가 독점을 깨는 사태를 피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긴 해도 말이다. 반면에 근본 적 독점은 대중에 의해 탄생되었다. 따라서 대중이 이 독점을 유지하는 비용을 계속 대지 않기로 결정하여 독점을 끝내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깨달을 때만 근본적 독점은 깨진다”(한글판: 96)고 봤다. 즉, 근본독점은 문화의 문제인 셈인데, 이를 독점문화라고 불러보자. 특별히 근본독점문화라고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일반)독점과 근본독점의 개념적 구분은 현실에 적용될 때 엄격하게 구분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연속적인 관계가 있다고볼 수 있기 때문이다(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체계 하에서 독점은 곧 근본독점을 지향하거나 이미 근본독점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근본독점을 깨기 위해서는 특정 기업의 재화와 서비스의 소비 시장에서의 독점, 그리고 그것의 강화된 형태로서 근본독점이 가능하도록 하는 독점문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저자들은 ‘자유’의 문제로 이를 논의하고 있는데 이 ‘자유’가 일상생활에서의 실천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문화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수많은 굴절들을 거치게 된다. 단적으로, 워키백과라고 하는 사회적 미디어가 새로운 지식 생산과 분배 – 소외되지 않은 노동, 배타적이지 않은 공유를 보여준다고 했으나, 그 사회적 미디어가 작동하는 논리구조(코드)의 층위에서의 근본독점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글판 제목인 “성장을 멈춰라! –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가 드러내듯이, 근본독점은 (경제)성장이라는 강력한 사회경제적 동인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 성장의 계열에는 발전, 진보, 개발, 혁신, 창조, 계발 등이 포함되는데, 특히 혁신, 창조, 계발의 문제로 오게 되면 사회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러한 근본독점의 동인들이 작동하고 있다.

뒤집어 보면, 이러한 자기 계발 등의 인간형과 일상생활 방식과 문화의 (재)조직화(혹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혹은 사회적 노동[문화]의 구조조정)를 독점문화로 분석하며 비판할 수 있고, 그 비판과 짝을 이루는 대안의 가능성들은 바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 혹은 창조적 행위)과 어떻게 그런 지배 문화에 대한 대항의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지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글:

네트워크 시위문화와 풀뿌리 미디어[운동]

네트워크사회운동 혹은 네트워크 시위의, 적어도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역사적 발전의 경향과 주요 사례들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사회변화의 중요한 한 흐름에 대한 분석이자, 전망 – 특히 그래서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밝힐 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단적으로, 2008년 촛불시위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사건이라고들 했지만, 그에 근거가 된 ‘새로움’은 거의 대부분 2002년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고, 전세계적으로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화된 네트워크된 사회투쟁과 지구적 대안 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는 현상임을 밝히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한 두 달 전에 시도하다가 여러가지 조건들이 안 받쳐주는 문제들과 함께 무엇보다도 혼자할 수 없는 작업이라 느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미뤘다고 생각한다.

아래는그 잔해의 일부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SPTZIN)의 신문 “문제는 자본주의다” 13호(2009년 11월 12일)에 실은 짧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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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안문 광장의 학살이 팩스, 전화와 함께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하여 즉각적으로 전세계에 알려지며 항의집회가 조직된 것, 인터넷을 통해 곧바로 국제연대와 지원이 이루어진 1994년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봉기, 전세계 에서 처음으로 파업 관련 웹사이트를 만들고 글, 사진, 동영상을 통한 파업의 정보를 신속히 배포한 1997년의 총파업 통신지원단의 활동, 그리고 10년전인 1999년의 시애틀 전투와 인디미디어센터의 활동은 네트워크 시위문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계기들이었다. 점차 확산된 네트워크 시위문화는 풀뿌리 미디어 행동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우선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임박했던 2003년 2월 15일 동시다발 반전행동이다. 전세계적으로 천만 명을 넘는 대규모의 시위는 미디어 활동가들의 노력과 독립적인 풀뿌리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화는 아주 단순하게 시작되기도 한다. 2002년 촛불시위는 한 네티즌의 제안이 여러 게시판들에 퍼날라진 것으로 시작되었고, 2008년 촛불시위 역시 연애인, 패션, 요리, 쇼핑, 성형수술, 스포츠, 디지털 기기, 동문 등의 비정치적인 온라인 공동체들에서 반정부 여론이 형성되고 시위 제안이 삽시간에 퍼져나간 것이 지속적인 대규모 시위 동원의 근거였다.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활용 사례도 점차 많아져 왔는데, 2001년 에스트라다 독재정권을 끝장낸 필리핀의 민중권력 운동의 ‘문자의 힘’(txtpower)이었다. 이러한 모바일 미디어는 시위를 조직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거리 행동과 전술을 실시간 조정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2008년 말 그리스 봉기는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유럽 전역의 연대 투쟁으로 확산되었고, 촛불시위에서는 휴대전화와 함께 인터넷 생중계가 결합하여 시위 행진의 경로나 전술에 대한 조율과 조정이 현장에서 곧바로 그리고 온라인과의 실시간으로 연결된 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시위문화라고 해서 꼭 첨단기술과 뉴미디어만 적극 활용된다고 봐서는 안 된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도, 다양한 길거리 미디어·낙서, 손팻말, 현수막, 티셔츠, 사물놀이와 거리악단, 민중가요나 대중가요, 율동, 경찰해산방송 패러디, 거리 퍼포먼스, 페이스페인팅에서 대형 집단그림까지 다채로운 직접 표현 양식들이 있었다. 특히 길바닥이나 차벽의 낙서는 온갖 풀뿌리 미디어 실천 중에서도 가장 참여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발언이자 직접 행동의 미디어 행동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영화 포스터나 예고편, 광고음악 등을 이용한 패러디나 ‘정치적 되섞기’(political remix) 같은 미디어 제작이다. 친숙한 대중 상업 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하며 정치적 의미를 되섞는 손쉬운 방법으로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오픈소스 문화와 대중 미학에 기반을 둔 대중문화의 정치화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의 시위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이었다.
네트워크 시위와 풀뿌리 미디어의 위력이 높아져온 만큼 그에 대한 탄압과 법제도적 억압도 거세지고 있다. 이란, 온두라스, 중국(위구르) 등에서 인터넷과 모바일 네트워크에 대한 정치권력의 통제는 빠짐없었다. 우리의 인터넷 실명제, 모욕죄 신설 시도, 인터넷과 휴대폰의 도감청, 저작권법의 삼진아웃제 도입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지난 9월에 있었던 쥐(G)20 반대 시위에서 ‘트위터’를 이용해 경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시위대에 제공한 활동가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사이버 망명과 같은 수동적인 대응보다는 익명성과 신뢰성을 보장하는 독립 미디어 기술과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활용하는 일이 향후 네트워크 시위문화를 결정할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http://sptzin.tistory.com/247

관련 글:

정보 사유화의 울타리 걷어차기: 자유소프트웨어운동과 그 이상

[문화과학[(60호, 2009년 겨울)에 기고하기 위한 원고 초안이다.

목차
0. "리룩스는 뭐하는거야?"
1. 정보 공유지에 울타리치기: 저작권, 마이크로소프트
2. 울타리 걷어차기: 공산과 공유의 정보 생산
2.1. 그누/리눅스와 자유소프트웨어운동
2.2. ‘생산의 정치’
2.2.1. 소스코드 혹은 생산수단
2.2.2. 생산 공동체의 공동체 생산과정
2.3. 사적 ‘소유의 종말’
2.3.1. GPL: ‘모든 권리는 뒤집어진다’
2.3.2. 공유지의 유지와 확장
3. 자본의 기생과 (재)종획
참고문헌

글의 내용

... 소프트웨어라는 정보 생산물이 정보 상품으로 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가 "몇 [십]년째 미친짓”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그누/리눅스와 같은 자유소프트웨어운동 이 만들어온 대안의 함의들을 짚어본다. 그것은 지배적 정보 생산양식의 시장 교환, 노동력 상품화, 위계적 노동분업,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사유화, 저작권 체제와는 다른, 그와 정반대의 정보 생산과 소유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왔다는 이야기이다. 자본주
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들과 정보 공유지를 구축하려는 최근의 노력들도 이내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되어왔고 자유소프트웨어운동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여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정보 사유화의 울타리 걷어차기: 자유소프트웨어운동과 그 이상(pdf)(11쪽)

아쉬움

너무 포괄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소유 방식을 다루면서, 더 재미있을 세부적인 쟁점들이나 문제(한계)들은 다루지 못했다. 10쪽 정도의 지면 제한도 있었지만, 비교적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것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이 국적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주로 미국이나 유럽의 맥락이고, 그 만큼 활발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나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 대한 다양한 변화와 역동이 있는데 이 역시 추적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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