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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다크나이트를 지켜죠” – 영화 자막 제작자 문화

“자막제작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보기(43분): http://youthvoice.or.kr/project/view/view/1272 혹은  http://durl.me/3wsuz

영화 소개: http://rarapippo.tistory.com/35

새로운 다큐멘터리 보기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는데는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이 영상이 과감히 보여주는 “어둠의 경로” 혹은 디지털-네트워크 지하문화의 한 단면은 볼만하다. 외국 영화의 자막을 번역·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가 나오기 때문이다. 문화생산물에 대한 적극적인 소비자 혹은 이용생산자들, 곧 우리들이 저작권에 대해 갖는 아래로부터의 입장과 주장을 통해서 현재의 저작권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판사라고 하는 말하자면 저작권 전문가의 횡설수설을 통해서 연출자의 저작권에 대한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려고 한 이야기 흐름과 연출은 역설적이고 자기배반적이다.

어쨌든,

“다크나이트” 혹은 ‘어둠의 경로’를 추적한 한 사례로 기록해 둔다. 불법복제 해커(이른바 헤비 업로더), 컴퓨터 해커(크래커), 바이러스나 스팸 작성 해커 등의 지하문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이들 본격 해커문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는데 참고할만 하다.

관련 글:

불법복제, 저작권, 노동과 인권의 문제

출처: 인권오름  228호 나들터 [집단지성의 노동과 놀이], 2010년 11월 24일 (http://hr-oreum.net/article.php?id=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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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복제, 저작권, 노동과 인권의 문제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어지고 특히 청년실업이 늘어만 가는 즈음, 불법복제 때려잡는 것을 일삼아온 각종 산업협회들은 우리가 불법복제를 줄이면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주장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소프트웨어산업을 포함한 정보산업(IT)과 음악, 영화, 게임 등의 문화산업에서 불법복제가 많은데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취업하는 부문이니 청년실업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수 천에서 수 만의 일자리 창출을 턱없이 잘도 떠벌리지만, 불법복제의 피해액을 계산할 때 그 (영화 다운로드 한 사람들은 모두 극장가서 영화 볼 사람들이었다는) 전제가 잘못돼서 그 피해액도 상당히 과장된 것임을 미국의 정부기관조차 인정한만큼(“미 정부, 해적질(불법복제)에 대한 연구가 엉터리임을 인정,” 2010.4.17) 창출된다던 일자리 수 역시 상당히 과장되었을 게 뻔하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첩 잡듯이 불법복제를 잡아먹는다. 불법복제 때문에 문화산업·소프트웨어산업이 망하고, 돈 안 내고 다운받으면 제작한 사람들 다 굶어죽고, 그래서 불법복제는 이제 일자리까지 빼앗고 있단다. 그런데, 불법복제 때문에 예를 들어 영화산업은 망하고 있나?

불법복제 때문에 망한다던 영화산업의 성장

헐리우드 영화 자본을 대표하며 저작권에 목숨거는 대표 단체의 하나인 미국영화산업협회(MPAA)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의 전세계 극장 수입(입장권 판매 수익)이 2008년에 비해 9%나 상승해 미화 299억 달러의 수익을 냈다. 2005년부터 보면 30% 이상 상승했다. 그래서 2009년은 영화산업 성장율 사상 가장 성장한 두 번째 해가 되었다한다. 심지어 2008년의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휘청할 때도 영화산업은 끄떡하지 않았던 것이다(대체로 인터넷으로 파일공유할 수 있더라도 영화가 좋다면 극장가서 보기 때문이다). 국내 영화산업도 엇비슷하다. 헐리우드 영화와의 경쟁, 헐리우드식 투기나 다름없는 영화 투자 등의 다양한 요인 때문에 비록 수익은 떨어졌지만, 1996년에 2천 만 명이 안 되었던 영화 관객 수가 2009년에는 1억 5천 만 명에 이른다. ‘음반’산업은 쇠퇴하는 반면 ‘음악’산업은 더 없이 발전하고 있듯이, 부가시장(비디오나 디브이디 대여)과 같이 특정한 배급기술에 의존한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더라도 영화산업 전체는 커져왔다. 불법복제 때문이라면 함께 줄었어야 할 극장 관객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와의 전쟁’에 버금가는 ‘불법복제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인터넷 이용을 필터링(검열)하고 모니터링(사찰)하고 삼진아웃제로 인터넷 접속을 아예 차단시키려는 조치들을 정당화해왔다. 또, 이제는 제작 노동자들(스텦)까지 앞세워 불법복제를 공격하고 있다. 2009년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을 위해 만들어진 한 홍보 비디오를 보면, 영화 제작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노동과정이 힘겨워지는 것은 돈 안 내고 영화 다운받는 불법복제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제작 노동자들의 “꿈과 열정”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은 우리가 불법복제를 줄이고 “굿 다운로더”가 되는 것이란다. 그런데 불법복제 때문에 망한다던 영화산업이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입장료 수익을 꾸준히 올렸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게 번 돈으로 유명 감독이나 작가나 스타 배우라는 ‘저자’에게는 수 십 억씩 챙겨주면서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다수의 제작 노동자들에게는 도대체 왜 최저생계비조차 공정하게 지불하지 않는가? 저 홍보 비디오에는 임금 체불과 불안정 노동에 고통받으며 그 “꿈과 열정”을 잃고 자살에까지 이르는 노동자들의 체념과 분노가 몽타주되지 않을 수 없다.

… 얼마 전 오래된 영화 친구가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어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울음 섞인 그 목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어야 했던 저는 제발 친구가 죽지않고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 정도로 겁이 났었습니다. (“영화스태프, 영화판을 떠나는 이유,” 2010.3.24).

우리가 “불법 다운로더”가 아니라 “굿 다운로더”가 될 때 이런 극단적인 불안정 노동의 고통이 진짜 사라지게 된다면야 ‘베리 굿 다운로더’도 될 참이지만, 불법복제가 줄면 행여 일자리가 창출될지언정 “꿈과 열정” 대신 체념과 고통으로 견뎌야 하는 일자리일 수밖에 없다면 불법복제를 계속 더 많이 해서 차라리 그런 일자리가 아예 생기지 않게 해야 할 지경이다. 영화 제작 노동자들을 또 한 번 팔아먹는 저런 식의 악랄한 인간주의(휴머니즘) 이야기에 지금껏 우리는 얼마나 많이 넘어가 주었는가…

‘저자’의 분화, 양극화

문화산업에 고용된 제작 노동자들의 예술 창작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믿음(특히, 대중 예술가 지망생들의 강력한 믿음)과 다르게 저작권법의 철썩같은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서만이 획득된다.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이 그랬듯이. 2007년 말에 무려 3개월 동안 지속된 ‘미국작가조합’(Writer Guild of America)의 파업은 온라인상의 추가 수익을 작가들에게 보상해 달라는 핵심 요구 사항 중의 하나를 관철시키면서 끝맺었다. 지적재산의 창조자가 그 노동의 성과를 보상받는다는 것이 바로 저작권 취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러나 투쟁을 벌이고 나서야) 대중적으로 그것이 공정한 요구로 인식되고 결국 다소간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었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겠지만, 온라인 유통을 통한 저작권 수익이 자신들 임금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면서 이제 작가 노동자들까지 (인터넷의 공유문화를 싸잡은) 불법복제 때려잡는 일에 나서게 되지 않을까? 아닌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의 무대예술 및 영화 관련 기술자와 예술가를 총괄하는 ‘무대예술피고용인국제연합’(The 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trical Stage Employees)의 국제부장이 최근 불법복제 해적질이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의 일자리까지 빼앗는다고 주장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영화제작 편수가 줄고 수익이 감소하고 있다면 모를까 제작 노동자와 소비자 간의 (불필요한) 대립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 따로 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 배우들이 불법복제하지 말라고 나서는 것은 씁쓸하지만, 노조가 저러고 나서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화나는 일이다.

또한 ‘미국작가조합’의 파업 사례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노조가 파업을 통해 온라인 저작권 수입의 분배를 얻어낼 수 있었던 조건이다. 2005년부터 작가조합의 가장 우선한 사업 목표는 ‘리얼리티 티브이 쇼’의 제작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대본 없이 제작이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지적재산의 저작자가 될 수 있는)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수당없는 추가노동과 만성적인 불안정 노동을 대본 작가 임금의 절반을 받으며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조합 지도부가 이들에 대한 노조 관할권을 요구하며 파업할 때 미디어산업 자본은 온라인 저작권 수입의 일정한 분배를 약속하는 대신 리얼리티 티브이와 애니메이션 제작 부문의 관할권을 노조가 포기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작가 노동자들의 저작권 수입 분배는 미조직된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희생으로 가능했다.

저작권: 노동과(의) 연대, 그리고 인권의 문제

이렇게 이간질 놓는 것에 분열되는 우리의 문제 상황을 벗어나 뭔가 제대로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문화의 생산-소비-공유의 애초 자연스러운 순환에 걸맞는 연대와 호혜가 복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을 나누면 좋고 하는 식의 문화가 확산되면 도움이 되지만, 산업화된 문화·정보 생산 구조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구조적 수준의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자들의 ‘자발적 가난’의 주창과 같은 우스운 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배급-유통 자본이 매개하고 통제하는 문화상품을 가운데 놓고 조장된 소비-이용자와 직접 생산자 간의 적대가 아니라 적극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현행법상 “불법 다운로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즉 정당한 파일공유인데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불안과 잠재적 위협 속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 그리고 자기의 노동 처우가 개선되는데 거의 도움이 안 되는데도 저작권이 자기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믿게 되는 문화산업·정보산업의 노동자 사이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연대는 오히려 불법복제에 큰 기여를 해왔다고 철퇴를 맞고 있는 인터넷, 특히 피투피(p2p) 기술의 도움으로 이미 확산되어 왔다. 하지만 더 널리 이런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저작권(그리고 불법복제)을 노동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자본-노동이 한 몸으로 뭉뚱그려진 저작자와 소비자(나 해적 공유자)가 대립하는 구도로만 설정된 이 분할 통치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그와 같은 연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보운동, 정보인권운동은 저작권 체제를 개혁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 연대의 정치학을 아직 기획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스웨덴 해적당의 한 의원이 초청받아 왔는데, 세계 곳곳의 해적당이 “울타리 없는 바다”를 위한 과감한 정치를 펼치고 있지만 고용된 노동자들의 소외된 노동에 대해서 그리고 해적과 노동자 간의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과감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그런 연대가 없다면 정보공유운동은 저작권법 강화의 과도함 정도를 개선하거나, 혹은 노동 유연화처럼 자본도 (그 회전속도를 늦추는 병목구간을 뚫기 위해) 다소 유연화하는, 그래서 문화 생산물의 소비문화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는 정도의 정보소비자운동에 그칠 수 있다. 소비자운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정보소비자운동은 저작권법이 잘 개정돼서 공정이용을 충분히 보장받으면 끝이지만, 그 지적재산을 직접 생산하는 그러나 그 생산과정을 자율적으로 자기결정할 수 있기는커녕 전면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지적재산권체제는 이미 만들어진 지적재산의 소비(이용) 방식에 대한 줄다리기이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것이었고 그래서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정보가 사유물이 되고 지식이 재산이 되는 바로 그 지적재산의 생산과정에 구조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인권 침해의 문제이다.

그래서 불균형으로 치닫는 지적재산에 대한 법적 권리 체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정보와 지식이 산업적 형태로 생산되는 현장의 노동과정과 대중 소비과정(이용 및 생산참여)의 연관성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엮어내야 한다. 초국적 제약자본이 수많은 환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약장사를 벌일 수 있도록 하는 특허 제도를 바꿔내고 의약품 접근권을 우선하는 운동 역시 제약산업의 생산과정에 개입해 들어가는 다양한 실험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대안을 만드는 연대, 인권

여기서 저작권의 문제, 지재권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는 것, 그래서 노동과(의) 연대의 문제로 본다는 것은 산업 내 노동에 대한 착취와 인권 침해에 개입하고 연대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저작권을 노동과의 연대와 인권으로 문제설정하는 것은 현재의 지배적 생산 구조에 대한 대안, 인권과 사회정의가 기본으로 된 정보문화와 정보생산방식들을 창안하는 데까지 미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급진적인 핵심의) 실현이 국가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지 않지만, 찰떡같이 붙어있는 노동과 소득을 분리한다는 생각을 우리 맥락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다면 저작권(과 불법복제) 논란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고통과 비용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 저작 노동에 대한 보상(논리)이 저작권(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노동과 별개로 보장된 생계 보장의 경제(생태 규범)는 연중 영화 찍는 날보다 일(당)없는 날이 더 많은 제작 노동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할 뿐더러(영화산업노조는 실업부조제도를 요구하고 있다), 28시간 내리 촬영하는 식의 불안정 노동구조 자체를 벗어나 새로운 창작 방식을 다양하게 모색해볼 가능성도 열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영화산업을 승자독식의 투자-배급-상영 구조(개봉 첫 주에 흥행의 성패를 내는 관행: 수 십 억대의 대량 판촉[마케팅] 및 스타배우 영입, 대형영화의 ‘창고대방출’과 중소영화의 조기종영 및 교차상영 등)로 몰아가는 (투기)자본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여러 대안적인 문화노동운동이 전개된다면, 영화 제작 노동자들은 지금처럼 극악한 임노동 관계의 굴레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독립적이면서도 상호부조적인 생산방식에서 자율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노동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불법복제 역시 불법의 딱지를 떼고 영화 애호가(팬)들의 자발적인 입소문 판촉(마케팅) 활동으로 다시 보이게 된다.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공유문화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통제받아야 할 불법 행위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영화를 자진해서 더 널리 알리고 퍼나르고 그러면서 그 수익 창출에 기여하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호혜의 마음은 중간업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 직접 생산자들에게 직접 보상하고 후원할 수 있는 방식들을 수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분리와 평행하게 생산물(영화)의 판매와 수익를 분리시키는, 영화산업 내에서조차 다양한 실험들이 되고 있는 판에…

다시, 불법복제: 노동과(의) 연대의 문제

즉, 불법복제 역시 지금과는 다른 생산 관계, 사회적 관계 속에서라면 누군가의 노동 혹은 예술 활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참여하는 협력적 생산 활동일 수 있다. 사실, 복제는 이제 생산이다. 오늘날의 네트워크문화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불법)복제는 관심(경제)의 창출이고 가치의 생산 과정이다. 그런 차원에서 (불법)복제 혹은 정보의 공유와 확산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노동이다. 현행법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노동 개념으로는 이용자노동 같은 것을 곧바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화산업, 정보산업의 여기저기서 지금까지 노동이 아니었던 우리의 어떤 활동, 놀이가 노동이 되고 있다. 대략 반 세기전부터 가사 일을 가사노동으로 달리 불러왔듯이.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복제 행위와 정보공유 놀이가 노동(자)성을 인정받게 되는 된다는 것도 끔찍한 일일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자유로운 어떤 활동이 본격적으로 (임)노동의 굴레에 들어가는 제도화를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프로게이머’가 그렇듯이. 따라서, 불법복제 혹은 p2p 파일공유 활동이 점차 (임)노동으로 포섭되는 과정에 대한 저항 역시 우리가 해야하는 또 다른 노동과의 연대의 방식이다.

참고한 것

  • “Technology and below-the-line labor in the copyfight over intellectual property,” Andrew Ross, American Quarterly, vol. 58, no. 3, 2006

관련 글:

해킹 문화/교육: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험과 배움

아래 내용은 (어떤 필요 때문에) 메모해 본, 완전 불친절한, 그야말로 메모에 불과하다.

해킹문화의 확산과 자율적 기술문화를 문화/교육으로 접근할 때 할 수 있는 기획의 단편들이다. 역시 함께 해킹할 곳! 에 대한 고민이 크다. 제작가 운동과 해커공간과 같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자율적 기술문화가 자본의 운동으로 어느덧 휘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공동체의 생산물이 계속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지켜질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장치에 대한 고안이 더 되어야 한다! (차차 정리해볼 참인데, 사례는 쏟아지고 있다!)

(디지털/네트워크) 놀이의 포섭: 소셜 미디어, 게임(화)

  • 기술문화: 정보, 디지털, 네트워크
    • 미디어-커뮤니케이션-기술의 변모
    • 이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 기술
    • 일상, 감성, 문화의 기술 - : ‘TALK PLAY LOVE’(삼성전자 애니콜2007년 상표 표어[brand slogan])
  • 미디어 소비 주체의 변모: 미디어 생산 참여
    • VJ, 시민미디어, UCC/UGC, 2.0, 1인미디어, 소셜미디어, … 게임()[gamification]
    • 포스트포드주의의 자본축적 방식의 반영
    • 부불 비임금 노동의 조직화: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자발적인 소비자(이용자) 노동의 확보
  • 놀이의 포섭
    • 자본(주의)에 의한 놀이의 포섭: 놀이의 노동화, 혹은 놀이노동(plabor)
    • 놀이노동의 착취: 즐겁게 착취 당하기
    • 공동체 정보·지식·문화의 수탈: 오픈소스, 공유문화 등의 수탈; “그냥 재미로“(리누스 토발즈) 수탈 당하기
  • 첨단기술 문화에 대한 리터러시
    • 착취 리터러시 혹은 수탈 리터러시: 첨단기술의 등장과 기술문화가 새로운 자본축적과 가치증식과 맞물리는 작동 원리와 과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개입이 필요.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 이반 일리히(Ivan Illich),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tools for conviviality)
    • 일리히가 든 사례: , 자전거, 도서관, 전화
    • 역사적으로 풀뿌리 공동체 기술(문화) 혹은 해커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음.
    • 정보기술문화 차원: 개인용컴퓨터(PC), PC통신, 인터넷, 3차원인쇄기(3D printer), 개인용제작기(PF, personal fabricator) .
  •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를 위한/통한 배움 과정
    • 주어진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학습과 교육하는 것(미디어교육, 컴퓨터교육, 최근의 스마트폰교육 등)이 아니라,
    • 주어진 도구를 변형해서(해킹의 원뜻)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한 과정 자체를 배움과 가르침!

3층위에 대한 교육적 접근

  •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3층위(layer) 논의틀
    • 참조: Yochai Benkler, Lorrence Lessig, 강남훈, 백욱인 등.
    • 콘텐트 층위(메시지)
    • 논리 층위(코드)
    • 물리적 층위(하부구조)
  • 3층위에 대한 교육적 접근
    • 콘텐트 - 미디어교육
    • 코드 - 프로그래밍
    • 하부구조 - 미디어 기술/정책
  • 평가
    • 미디어교육은 주로 콘텐트 층위에서 이루어져왔는데, 이 교육이 초점을 맞춰온 (미디어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직접 제작 활동은 콘텐츠 층위만 놓고 보면 진보적이지만, 코드(논리) 층위를 고려해볼 때 비판과 직접 제작 자체로는 그 지배적 논리(코드) 시스템에는 별다른 개입(혹은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시스템의 보다 유연한 발전에 기여해왔다. 자본주의의 내부의 작동 원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 콘텐트(의 생산·유통·이용)가 통제되는 시스템의 논리 - , 코드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코딩)에 대한 교육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 동 시에 하부구조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물질적 토대)까지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를 위해서도 최소한 코드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 역시 그  기술과 정책 차원의 논리(기술적 코드, 법률적 코드) 하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리터러시 역사 도식과 프로그래밍

  • 더글라스 러시코프(Doug Rushkoff), “미디어의 한 기능으로서의 사회 통제“(Social Control as a Function of Media)
Pharaoh X Priest X2 King X3 Government X4 Corporation X5 ??? X6 ??? X7
Controller
Capability
Hear (God) Read Write Program Systematize ??? ???
HIEROGLYPH ALPHABET PRINT/BCAST COMPUTER NETWORK ??? ???
Mass
Capability
Believe Hear Read Write Program Systematize ???
Xm Media Capability of the Masses

Xm+1 Media Capability of their Controllers

In each new era, massess acquire capability of previous one. Text leads to a society of “hearers” read to by priests, computer leads to a society of “bloggers” using interfaces programmed for them. If algorithm hold, massess will acquire programming skill only after corporations develop capability to assimilate their programs.

  • 설명

    • 출처: deoxy.org 혹은 edge.org

    • 대중의 미디어 활용 능력은 역사적으로 바로 이전의 지배자의 미디어 활용 능력이었다: 지배자가 말하면 대중은 듣고, 지배자가 읽으면 대중은 이제 말할 수는 있고, 쓰면 읽을 수 있고한 차원 엇갈린 미디어-사회통제의 단계를 형성해왔다는 것.

    • 이는 곧 미디어 리터러시의 역사로 볼 수 있음: 늘 지배자보다 한 단계 늦어왔던 대중의 미디어 리터러시!

  • 몇 가지 토론지점
    • 현대에 올수록 그 한 단계 늦은 리터러시가 훨씬 빠르게 전개되고 격차도 좁혀가고 있음.
    • 위 도식을 전제할 때, 콘텐트 층위에서의 리터러시(미디어교육)를 통한 미디어(콘텐츠) 생산에 대한 참여가 갖는 한계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음: 역사적으로 지배와 통제는 그러한 생산의 참여 보다 적어도 한 단계 앞서 나가고 있기 있기 때문.
    • 따라서 오늘날 네트워크(인터넷 등)를 주요 매개로 하는 환경에서, 적어도 시스템의 프로그래밍에 대한 대중 리터러시까지 나갈 필요가 있음.
      • 참조: 러시코프(Doug Rushkoff)의 최근 책: <프로그램할 것인가, 프로그램당할 것인가: 디지털 시대의 10계명>(Program or Be Programmed: Ten Commands for a Digital Age, OR Books, 2010).

자율적 기술문화(해킹문화) –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험과 배움

  • 다양한 해킹문화(풀뿌리 기술문화): 컴퓨터해킹에서 생명해킹까지
    • 소프트웨어 해킹: 자유소프트웨어운동, 오프소프트웨어 개발
    • 게임 해킹: 모드(MOD), 머시니마, 아마추어 게임 개발 등
    • 전자제품 해킹 혹은 하드웨어해킹
    • 자동차 해킹 (: Oscar, eCars ? Now! project )
    • 에너지, 전기 해킹 (: …)
    • 오픈소스 위성 (: opensat.cc/kr)
    • 음식 해킹 (: foodhacking.com )
    • 도시해킹 (: hacking-the-city.org )
    • 유전자 복제를 위한 아마추어 오픈소스 기계 제작 (: OpenPCR [polymerase chain reaction] )
    • … 자작 산업혁명, 열린디자인 등.
  • 해킹 놀이터: 해커스페이스(hackerspace) 혹은 팹랩(fablab, fabrication lab)
    • 주로 유럽과 미주지역이지만, 각 곳에 다양한 하드웨어해킹을 위한 열린 (물리적) 공간으로 해커스페이스‘(hackerspace, http://hackerspaces.org)가 있음.
    • 이와 유사하게 개인제작기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는 팹랩(fablab, Fab@Home) 역시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풀뿌리 기술문화의 장으로 여기저기서 운영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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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어진 세계에 대한 해킹 &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험과 배움
    • 현실적으로 - 물건 디자인 (PF, HW해킹)
    • 가상적으로 - 게임 디자인 (+ 이미지, 음악, 영화)
  • 풀뿌리 기술 공방
    • 해커스페이스나 팹랩과 유사하게 자율적 풀뿌리 기술 공방을 운영할 수 있음. (놀이+예술+기술 랩).
    • 시범 운영하면서 다른 곳들에 이런 공간과 운영 프로그램이 생길 수 있도록 추동하고 지원하는 역할, 혹은 국내 및 국제적 교류 활동도 할 수 있음.

교육 프로그램(예)

그누-리눅스 설치 축제
  • 컴퓨터의 토대가 되는(소프트웨어의 소프트웨어) 운영체계(OS)를 자유소프트웨어인 그누-리눅스로 설치하는 방법을 서로 배우면서 실습하는 자리.
아르두이노(arduino)를 이용한 창작
  • 아르두이노(arduino): 말하자면, 오픈소스 회로기판을 이용한 다양한 자가 전자 기기 창작하기.
게임 디자인
  • 게임을 이용한 영화만들기 - 머시니마 제작 
  • 더 나아가, 게임을 직접 디자인하는 과정.

관련 글:

데이터베이스, 하드웨어에 대한 자유 이용허락

그누 일반공중이용허락(GNU GPL), 창조적공유지(CC), 정보공유라이선스가 그나마 알려진 것들이고, 위로부터가 아니라 우리가 자체적으로 만든, 자원을 어떻게 나누어 공생할 지에 대한 ‘생태 규범’이다. 말 그대로 경제(eco-nomy)이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고, 우리 각자가 하나씩 만들어도 된다. 잘 안 알려진 것들 중에 눈에 띠는 것들이 있는데 차차 들여다보기로 하고,

아래의 두 가지는
데이터베이스나 하드웨어에 대한 자유 이용허락 문서이다.

이렇게 자원에 대한 접근을 열어놓고 자유롭게 공유해 이용하며 더 많이 더 좋게 창작·생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운동은 확대되고 있다. 물론, 원치 않게 강탈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자유 이용허락은 데이터베이스가 그 자체로도 큰 가치가 있지만 또 다른 정보 생산을 위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원천이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정보·지식의 생산(력)을 풀어놓는 일일 것이고,

하드웨어는 그 설계·조립의 디자인을 공개하여 누군가 자유롭게 직접 배우고 만들고 고치고 다시 나누는 것을 허용하면서, 비물질적인 정보에만 국한되었던 자유문화를 물질재 – 아날로그 복제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다만 이미 그래왔던 역사를 고려하면,

개방/공유/자유를 규범으로 명시하는 것은 여하간의 규범들에 종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창조문화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회의적이다. 닫힌 법 규범에 대한 열린 규범으로의 대응 방식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해킹활동가들은 저작권에 대한 반대는 곧 그것을 대체하는 것들까지도 포함한 규범화 자체의 반대여야 한다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 저작권과 저작권대안이 공히 전제하고 있는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

그럼, 경제 자체를 버리는 것이 가능한가? 하여간 그런 문제 의식까지 버리지 않고, 가상세계와 물질세계 모두의 새로운 경제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형성될 수 있는지 차분히 살펴나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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